산 이야기

가을바람, 가을꽃, 영월 <장산>에는 가을이 온다.

adam53 2024. 9. 7. 20:12

오는 계절을 막을 수 는 없나 봅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무더위가 가실 줄을 모르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해 졌는데요,

오늘은 영월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 '장산'에서 가을을 맞이하려고 갑니다.

10시 50분

영월 상동의 망경사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원래는 꼴두바위주차장에서 상동소방서가 있는 마을을 지나, 포장도로를 한참 걷다가 망경사 가는 길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아직은 날씨도 덥고 또, 장산은 높아서 산행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기에, 우리를 태운 산악버스가 여기까지 데려다 준거죠.

입구에서 몇발짝 가지 않아 오른편에는 사람들이 살지않아 폐가가 된 '상동 중석광산' 사택들이 보입니다.

과거 한국은 세계적 텅스텐 수출국이었죠. 국영기업 대한중석이 상동광산에서 채굴한 텅스텐은 한때 전체 한국 수출의 70%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60~70년대 이곳에 "돈이 돈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에서 사람이 몰리면서, 상동읍에만 3만명 이상 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국의 텅스텐 ‘덤핑 공세’로 가격 경쟁력을 잃어가다가 1993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이 된 이후,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하나 둘 떠나감으로 인해 2020년 말 상동읍 인구는 1,094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해요.

상동광산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장기간 방치돼 있던 것을 외국자본이 부활시켰는데요, 캐나다 텅스텐 업체 '알몬티'가 상동광산 광업권을 인수, 2021년 초 상동읍내에 ‘알몬티 대한중석’을 설립했습니다.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서 텅스텐은 유일하게 경쟁력을 갖춘 자원이었으며, 아직도 상동 광산엔 5,800만톤 넘는 텅스텐이 매장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합니다. 연간 100만톤씩 캐도, 50년 이상은 걱정 없는 규모라고 해요.

한국의 중석(텅스텐)은 품질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해요. 상동광산에 매장된 텅스텐의 광물 내 함량은 0.44%로 중국산(0.19%), 세계 평균(0.18%)의 두 배가 넘는다지만, 상동광산에서 캐는 텅스텐은 안타깝게도 한국의 소유가 아니랍니다.

채산이 시작되어도 국산 텅스텐은 제조·판매업체인 미국 ‘GTP(Global Tungsten &Powders)’로 보내져 제련을 거쳐 '미국산' 완제품으로 판매된답니다. 한국 정유업체가 중동산 원유를 들여와 각종 석유제품으로 파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국내 채굴 텅스텐을 사용하려 해도 사실상 우리에게 '텅스텐 자원 주권'은 없다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정상까지는 3.7km랍니다.

보통의 평범한 산이라면 이 정도의 거리는 그저 그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가는 길

'입산통제' 안내판이 보이는 군요.

국립공원이 그러하듯이, 영월 장산도 산불예방기간인 2월부터 5월 중순까지 그리고, 가을철 11월부터 12월 15일까지는 입산통제를 한답니다.

이정표가 보이죠?

망경사를 거쳐서 정상가는 길은 쉬운 길이고, 오른쪽의 잡목과 풀이 무성한 길은 험하고 고갯길이 만만치않다고 해요.

망경사로 가면 4km, 힘든 길로 가면 4.2km라서 거리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이 길로 가면 홈통바위와 서봉을 지나간다기에 힘든 길로 접어듭니다.

길이 좀 그렇죠?

등산로가 이렇다는 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월에서 제일로 높은 山임에도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기암괴석과 바위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볼 수 없다거나, 산이 높아서 산행하기 힘들다거나 또 그 흔한 계단도 하나 없는 정비가 안된 등산로 등등.

정말로 가파른 산길입니다.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와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날씨인데도 땀이 날 정도로 힘이 듭니다.

등산로도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만들어진 희미한 길입니다.

송전 철탑에 다다른 시간은 11시 20분. 

철탑을 지나면서 돌맹이들이 나란히 놓인 곳을 올라갑니다.

왠 돌맹이가 있을까? 했는데 돌맹이들을 딛고 가면서 알았습니다.

이 돌맹이들은,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돌계단이었죠.

올라가는 길에 이정표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정표 하나 없는 길에서, 어쩌다 만나는 리본은 고맙고 반갑기까지 합니다.

일행 중에는 망경사로 올라 간 이가 있었습니다.

하산 한 후에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힘들다는 이 길로 올라간 게 참 잘했더군요.

망경사를 지나 등산로 초입은 넓게 해 놓았더래요.

그래서 '야! 이 길 너무 좋게 만든 거 아냐?' 했는데 왠걸요, 100m도 못가서 길이 없더랍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쪽으로 다녀서 생겼던 길이 근래에는 사람들이 가질 않아서 희미해진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망경사로 도로 내려와 그 옆 계곡길로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계곡길도 사람들 발길이 뜸해져서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 

이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무조건 계곡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대요. 길이 없어 잡목을 헤쳐가며 고생 고생하면서 위로 올라갔더니, '힘든 길'로 올라간 일행을 만났답니다.

결국 장산을 찾는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힘든 길'로 올라간다는 거죠.

이 바위에서 잠시 쉽니다.

가파른 길을 쉬지않고 왔더니 많이 힘들군요.

다시 떠나는 길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길이 아주 엉망입니다.

길을 찾아가야 해요.

사람들의 발밑에 눌려서 주위와는 쬐끔 다른 곳, 그게 등산로입니다.

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왔습니다.

여기가 홈통바위네요.

바위와 바위사이로 빠져 나가요.

뒤돌아 본 홈통바위

쑥부쟁이가 피었어요. 과거에는 가을에 피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가리켜 '들국화'라 했었죠.

11남매를 둔 가난한 대장장이의 딸이 있었는데, 그집 큰딸 쑥부쟁이는 쑥을 캐러다니는 불쟁이라는 뜻에서 그리 불려졌고, 그 쑥부쟁이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쑥을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그 산등성이에 많은 나물이 돋아났는데, 사람들은 가난한 동생들을 위해 돋아난 나물이라고 해서 '쑥부쟁이'라 한답니다.

(블로그 말미에는 '쑥부쟁이의 전설'이 있습니다)

장산은 상동읍 구래리와 천평리 사이에 위치하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함백산이 서쪽으로 가지를 쳐 웅장하게 솟구친 山이랍니다.

남쪽과 서쪽은 바위와 절벽지대로 이루어져 경관이 매우 수려하고, 북쪽과 동쪽은 완사면으로 상동에서 태백 방면으로 가다 '칠랑이 골'에서 좌측으로 쳐다보면 성벽처럼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고 해요.

주능선길은 사계절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다고들 하죠.

이른 봄이면 얼레지, 노루귀, 복수초, 중의 무릇등 눈속에서 피어나는 야생화가 집단군락을 이루고, 여름에는 하늘을 가리는 짙은 녹음,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과 마가목의 붉은 열매는 꽃처럼 아름다우며, 겨울에는 산호초 같은 설화가 절벽과 어우러져 선경의 세계에 들어 온 듯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山客들을 위해 '이정표를 세워줬으면' 싶더라구요.

길을 찾지 못해 이런 바위로 올라가고, 어떤 때는 알바하다가 되돌아 온 일행을 만나기도 합니다.

길을 제대로 찾았나 봅니다.

저 멀리 맞은 편에는, 왜 동그랗게 벌목을 했는 지 알 수 없는 모습도 보이고.

'이게 길이 맞겠지?'

그렇게 바위사이로 올라갑니다. 헷갈리기 쉬운 곳에 이정표가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저만치 앞에는 장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사진에는 그저 밋밋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봤을 때 상당히 높아보입니다.

가을을 알리는 미역취도 노란꽃을 피웠습니다.

8월에서 9월에 걸쳐서 기다란 줄기에 노란색의 꽃이 피는 미역취는 취나물의 일종인 만큼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식물체에는 사포닌 물질이 들어 있어 약으로도 씁니다. 

12시 40분

바위사이로 올라오면 여기가 서봉입니다.

어디에도 서봉이라는 표시는 없지만, 그냥 촉으로 아는거죠.

늦은 점심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봅니다.

저만치 함백산 보여요. 정상 주위에 돌탑을 비롯한 설치물들이 있거든요.

줌으로 당겼더니 이제 잘 보이죠?

가야 할 장산의 뾰죽한 봉우리

13시

장산을 보며 일어섭니다.

서봉의 내리막길을 지나서 능선길을 걸을 때, '전망대' 표시가 있어 그 쪽으로 가 봅니다.

전망대의 바위는 서 있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을 하고 있고, 전망도 별로네요.

뒤돌아 바라 본 서봉

전망대를 지나 얼마가지 않아 다시 '전망대' 표시를 만났지만, 이 전망대는 그냥 지나칩니다.

촛대바위도 잠시 들려보고 가는데

서봉까지 올라오는 게 힘들었던 반면, 정상가는 길은 완만한 능선길입니다.

힘든 건 전혀 없습니다.

풀밭길을 지나갑니다.

와!

동자꽃 한포기를 만났습니다. 꽃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동자꽃이라 하는데요,

깊은 산속 암자에 홀로 남은 동자가,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눈이 많이 내려서 암자로 오지 못하자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서 꽃으로 피어났다는 그 전설.  오세암의 유래와 같은 얘기죠.

하산길에는 이정표도 보이고 쉼터도 마련해 놓았네요.

장산에는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투구꽃도 피었거든요. 투구꽃은 서늘한 그늘에서 잘 자라는데, 햇빛을 많이 받으면 오히려 꽃이 피지 않는다 해요. 보라색꽃이 예뻐서 관상용으로도 심기도 하지만, 한약재로도 쓰이기 때문에 한약명이 따로 있습니다.

초오두(草烏頭)ㆍ초오(草烏)ㆍ오두(烏頭)는 투구꽃의 덩이뿌리를 뜻하고,  부자(附子)는 초오 옆에 자라는 조그만 덩이뿌리를 가리키는데, 독성이 강한 풀이라서 사약의 재료로 쓰기도 했지요.

이런, 이 이정표 좀 봐요.

처음에 한번 세우고는 시정하고 보완할 건 없는지 돌아보면서, 관리를 하지 않아 제구실을 못하고 있어요.

하기는 산이 워낙 가파르고 힘드니까 다시 올 엄두가 나지도 않았겠죠.

오리방풀이 무리지어 핀 곳도 지납니다.

밧줄을 매어놓은 곳도 있어요.

풀고사리밭을 지나자

훤히 보이는 하늘.

드디어 장산에 도착했습니다.

13시 40분.

여기까지 3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정상에는 데크를 마련해 놓아 쉬기 좋군요.

6~7평 정도 남짓한 정상에서의 조망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발 아래 칠랑이골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순경산, 가매봉, 매봉산이 줄지어져 서 있고 함백산, 태백산,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장쾌하게 이어집니다.

해발 1408.8m의 壯山에서 사진을 찍고

가을햇살이 따스한 정상을 떠나기 싫어 머뭇거립니다.

올라올 때의 그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가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오는 평화로운 여기가 마냥 좋아집니다.

정상 바로 밑 이 계단부터는 내리막이 시작됩니다.

하산은 동릉을 타고 어평방향이나 칠랑이골 백운산장으로 하산할 수 있다지만, 그쪽 길은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서 길도 형편없답니다.

이정표에도 그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다. '등산로 입구'만 표시했죠?

이정표에서 가르키는 '등산로 입구'는 장산야영장에서의 들머리를 말합니다. 

장산야영장으로 내려갑니다.

가파른 산을 올라온 만큼, 내려갈 때도 그만큼의 가파른 길을 내려갑니다.

와! 이거 장난이 아니군요.

밧줄 구간을 지나도 내려쏠리는 건 마찬가지.

경사가 너무 심한데요!

14시 55분

잠시 쉬어갑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내리막길

너무도 급한 내리막이라서, 지그재그로 길이 나 있습니다.

그래도 몸이 쏠리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러다 물가처럼 찌찌한 풀밭을 내려오고

이제는 좀 낫겠다 싶으니까 산을 다 내려왔네요.

오른쪽의  평평한 풀밭으로 내려왔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파란색 설치물은 '장산등산로' 들머리를 가르키는 안내판이구요.

이 다리 부근은 야영장

다리밑 냇물가에는 야영객들의 텐트가 줄지어 쳐져 있습디다.

칠랑이골 개울물은 수량도 많고 물살도 제법 센편이었죠.   발을 담갔을 때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산행으로 지친 피로를 말끔히 가셔줍니다.

검은색 건물에는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던데, 피서철이 끝나서인지 문을 잠가서 사용불가입니다.

가을바람 소슬한 장산 산행은 여기서 마칩니다.

당초계획은 산행을 마친 후 이끼계곡까지 다녀 올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이끼계곡은 생략합니다.

오늘은 대략 7km를 걸었습니다. 4시간 40분이 소요되었구요.

평균속도가 1.9km 라는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조금 여유롭게 걸었던 때문이기도 해요.

산행코스 : 망경사 입구 - 홈통바위 - 서봉 - 촛대바위 - 장산 - 장산야영장 (6.9km, 4시간 40분 소요. 평균 1.9km로 걸었음)

 

쑥부쟁이의 전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가난한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11남매나 되는 자녀들이 있었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매우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항상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였지요. 이 대장장이의 큰딸은 쑥나물을 좋아하는 동생들을 위해 항상 들이나 산을 돌아다니며 쑥나물을 열심히 캐왔기에 동내 사람들은 그녀를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네 딸' 이라는 뜻으로 쑥부쟁이라 불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쑥부쟁이는 산에 올라갔다가 몸에 상처를 입고 쫓기던 노루 한 마리를 숨겨주고 상처까지 치료해 주었답니다.

노루는 고마워하며 언젠가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속으로 사라졌지요.

그날 쑥부쟁이가 산 중턱쯤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한 사냥꾼이 멧돼지를 잡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쑥부쟁이가 치료해 준 노루를 쫓던 사냥꾼이었습니다.

쑥부쟁이가 목숨을 구해 준 사냥꾼은 자신이 서울 박재상의 아들이라고 말한 뒤, 이다음 가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쑥부쟁이는 그 사냥꾼의 씩씩한 기상에 호감을 갖고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가을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였지요.

드디어 기다리던 가을이 돌아왔습니다. 쑥부쟁이는 사냥꾼과 만났던 산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사냥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쑥부쟁이는 더욱 가슴이 탔습니다. 애타는 기다림 속에 가을이 몇 번이나 지나갔지만 끝내 사냥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쑥부쟁이의 그리움은 갈수록 더 해 갔습니다.

그동안 쑥부쟁이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더 생겼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쑥부쟁이의 근심과 그리움은 나날이 쌓여만 갔습니다.

어느 날 쑥부쟁이는 몸을 곱게 단장하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깨끗한 물 한 그릇을 정성스레 떠 놓고 산신령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그러자 갑자기 몇 년 전에 목숨을 구해 준 노루가 나타났답니다. 노루는 쑥부쟁이에게 노란 구슬 세 개가 담긴 보랏빛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이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을 마친 노루는 곧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쑥부쟁이는 우선 구슬 한 개를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병이 순식간에 완쾌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쑥부쟁이는 다시 산에 올라가 사냥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냥꾼은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쑥부쟁이는 노루가 준 주머니를 생각하고, 그 속에 있던 구슬 중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사냥꾼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냥꾼은 이미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둘이나 둔 처지였습니다. 사냥꾼은 자신의 잘못을 빌며 쑥부쟁이에게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쑥부쟁이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에게는 착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으니 그를 다시 돌려보내야겠다.’

쑥부쟁이는 마지막 하나 남은 구슬을 입에 물고 가슴 아픈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쑥부쟁이는 그 청년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은 자꾸 흘러갔으나 쑥부쟁이는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동생들을 보살피며 항상 산에 올라가 청년을 생각하면서 나물을 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쑥부쟁이는 산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쑥부쟁이가 죽은 뒤 그 산의 등성이에는 더욱 많은 나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쑥부쟁이가 죽어서까지 동생들의 주린 배를 걱정하여 많은 나물이 돋아나게 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연한 보라빛 꽃잎과 노란 꽃술은 쑥부쟁이가 살아서 지니고 다녔던 주머니 속의 구슬과 같은 색이며 꽃대의 긴 목 같은 부분은 아직도 옛 청년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쑥부쟁이의 기다림의 표시라고 전해집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쑥부쟁이 나물이라 불렀습니다.

쑥부쟁이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이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