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

겨울날의 트레킹 - 인왕산, 북악산 성곽길을 걷다.

adam53 2023. 12. 22. 14:10

2023. 12. 19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한양도성 성곽길을 조금 걸어보려고 합니다.

인왕산과 북악산 성곽길을.....

서울에 진입했을 때는 10시가 넘었습니다. 아침 출근시간 때라서 그렇겠죠? 

아침 일찍 출발했기에 빨리 도착할꺼라 생각했는데, 도착시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걸리는군요.

차창밖으로 보이는 고층건물들.

여기는 서울입니다.

10시 30분.

인왕산을 들렸다가 북악산을 가려고 도로변에서 하차합니다.

인왕산 들머리는 몇군데 있지만, 우리는 가장 짧은 코스로 가려고 해요.

겨울해는 짧아서 금방 어두워지기에 최대한 산행시간을 단축하려구요.

무악청구아파트를 지나갑니다.

 

 

담벼락 옆 계단을 올라갑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데, 앞사람들은 길을 잘도 찾아가는군요.

계단을 올라가

넓은 공터를 만납니다.

화장실도 있어요.

'인왕산 둘레길'로 가는 계단

인왕산 안내문도 한번 읽어보고

줄지어 계단을 오릅니다.

눈이 살짝 내린 아침이라 좀 춥네요.

덩굴식물이 말라버린 사잇길로 올라가자, 약수터가 있다기에 어떤가하고 들려봅니다.

약수터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산중턱에서 나는 귀한 물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다 흘낏 보곤 지나갑니다. 

인왕산에는 곳곳에 약수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관리한다면 누가 이용할까요?

흥인약수터 갈림길에서는 '인왕산 성곽길'로 갑니다.

계단이 있어 수월하게 올라갑니다.

성벽이 보이는군요.

성벽은 보수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때도 안탔습니다. 

이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이 있고, 인왕산 둘레길은 북악산 성곽길과 연결이 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범바위는, 가는 방향 반대편에 있기에 그냥 눈(目)으로만 가 보고.

성벽을 따라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성벽 바로옆 돌계단은 '위험하다'는 팻말이 있어 그 바로 옆에 있는 길로 ..... 가요.

바위를 움푹 움푹 쪼아서 한개 한개의 계단을 만들었네요.

정으로 쪼아서 만드느라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서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들이 수고한 덕분에 편하게 올라가고 있지만, 얼마나 애써서 힘들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면 짠해져옵니다.

인왕산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은 노출되어 있는데 

그 화강암의 계단마다, 석수장이의 땀과 눈물이 보이는 듯 합니다.

저 아래 범바위로 가는 길의 성벽은 뱀이 지나가는 것 처럼 보이고.

우뚝 우뚝 고층건물이 솟아있는 서울 시내와 뾰족한 남산타워도 봅니다.

계단 끝에 뭔가 있을 것 같아 걸음을 빨리합니다.

아!

성곽 맨 위에 올려놓는 옥개석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네요.

옥개석을 소중히 보관하는 인왕산은 물론이려니와, 북악산도 처음 와 보기에 모든 게 신기하게만 보입니다.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지만,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개방했답니다.

그리고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고 해요.

옥개석이 있는 곳에서 몇발짝 안가서 정상이 있구요.

높이 338.2m의 인왕산 정상입니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죠.

조선 중기 인물인 車天輅의 ≪오산설림≫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으려 하였으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면서 극구 반대하여, 그의 주장이 좌절된 무학대사는 탄식을 하며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군요.

신라 말의 도선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山水秘記]에는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대로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일어났으며,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해요.

이러한 내용은 19세기 기록인 ≪한경지략≫에서도 있다는군요.

인왕산은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 산이었다죠.  지리산이나 금강산보다 인왕산의 호랑이가 더 유명했다는데요, 태종 5년(1405) 7월에는 경복궁 안까지 들어와 횡행하였다고 하며,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했었답니다.

그 밖에도 호랑이의 민가에 대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서 세조는 친히 세 번이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도 호랑이를 사냥하였대요.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에는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의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그 해를 입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대요.

 

 

그 후,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답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몇발짝 내려와, 왼쪽 창의문 방향으로 갑니다.

뒤돌아 본 인왕산 정상

평지를 걷는 수원화성과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는 남한산성 성곽길과는 다르게, 인왕산 성곽둘레길은 경사가 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든 건 아니에요. 계단이 있거든요.

소나무 두 그루가 가지인 듯 가지아닌, 뿌리로 맞닿아서 살아갑니다.

부부소나무입니다.  연리지(連理枝)이죠.

인왕산 성곽둘레길은 신선하면서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지는 군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왔습니다.

지척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어도, 그냥 갑니다.

오늘도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느긋하게 산행을 하지 못하는 게 늘 아쉽기만 합니다.

시인 윤동주 영혼의 터

성벽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벽에 올라가면 추락위험도 있고, 훼손될 수도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해도 올라갑니다.

그놈의 사진이 뭐라고, 사진찍는 것에 목숨을 겁니다.  쯧 쯧 ...

도로를 건너가야 해요.

길 건너 저 편에 창의문이 보이는군요.

지붕위의 잡상(雜像)들을 당겨봅니다.

잡상은 궁궐의 지붕 처마끝자락을 장식하는, 인물이나 동물 모양의 조각상인데요. 궁궐건축의 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반 민가에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요. 현대의 건축물에는 청와대 본관 지붕에 잡상이 ..... 있구요.

길 건너가서 이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창의문으로 들어가요.

창의문은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소문 가운데 서북쪽 문(門)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합니다. '자하문'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그 이름이 종종 나오죠. 이 창의문은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었는데, 일시적으로 왕명에 의해 통행을 허가하였다고 해요.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랍니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구요,  이 창의문은 2015년 보물로 지정되었답니다.

창의문을 나와서 계단위로 올라간 다음, 푸른 철책울타리를 따라 갑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북악탐방안내소'가 있습니다. 여기서 탐방출입 신청서를 작성하고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었죠.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 30명이 대통령 관저를 기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북악산의 서울성곽길은 40년간 출입금지 구역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2022년 5월 10일 제20대 윤석열대통령이 취임을 하고, 대통령집무실이 용산으로 바뀌면서 청와대를 개방하고 북악산 탐방로도 개방하면서, 이제는 누구나 출입신고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시 50분.

지금부터 북악산 탐방로를 걸을 꺼에요.

올라가는 길이 좀 가파르게 보이죠?

눈에 보이는 그대로 힘든 구간입니다.

군사시설을 촬영하지 말라는 안내판은 곳곳에 보이고

돌고래쉼터에서 숨 좀 고르고 갈께요.

바위모양이 돌고래같다고 이름붙인 돌고래 쉼터는, 계단오르기 힘드니까 잠시 숨 좀 돌리고 가라고 만든 데크.

그래서 숨 고른 후 다시 계단을 오릅니다.

22일은 24절기 중 스물 두번째인 동지(冬至)입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작은 설’이라 했다고 합니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죠.

그 유풍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거나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대문이나 문 근처 벽에 뿌려서 액운을 없애는 풍습이 있었는데요,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무서워했기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짓날에 팥죽을 쑤게 되었다는 거죠.

팥죽은 악귀를 쫓아내는 음식이므로 제사에는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팥죽에 꿀을 타서 명절음식으로 제사에 올리기도 했다는군요.

또,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御璽,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줬다고 해요. 관상감은 천문, 지리, 기후관측, 강우를 담당한 기관이었구요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달력을 선사했답니다. 동짓날이 부흥을 뜻하고 이 날부터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이랍니다.

당시 도성에서는 단오날이 되면 관원이 서리에게 부채를, 동짓날이 되면 서리가 관원에게 역서(歷書, 달력)를 주고 받았기에 '여름 부채'와 '겨울 달력'이라는 말이 생겨났구요.

백악쉼터는 그냥 지나가요.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있어 방해하고 싶지 않거든요.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는 40~50분가량 걸리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건, 백악마루로 가는 계단이 엄청 가파르기에 쉬엄쉬엄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단을 오르다 잠시 멈추면 보이는, 건너편 저 멀리의 산.

바위로 된 산이 우람해보입니다.

이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직진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백악마루- 북악산 정상입니다.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산.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했다고 해요.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렸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렀으며, 일부는 북악이라고 불렀답니다.

문화재청은 2007년 북악산 일대를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하였다가 2009년 명승으로 지정하였는데요,

명승 지정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內四山 :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산 일원”으로 정하였대요.

즉, 일제 강점기 이후 불린 북악산이란 이름 대신에,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백악산으로 회복시키기로 한 것이죠.

그러므로 '북악산', '북악산' 하는데 북악산은 이제부터 백악산으로 불러야겠습니다.

백악마루를 내려와 화살표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갑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1. 21사태 소나무'가 있죠.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간첩 김신조의 입에서 나온 말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김신조 등 북한군 31명은, 1968년 1월 21일 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을 벌인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는데,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과정에서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총탄을 맞았던 소나무의 이름은 사건 이후에 ‘1·21 사태 소나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침투한 31명 중 29명은 사살되었고,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되었으며 생포된 1명이 바로 김신조였죠. 김신조는 이후 우리나라로 귀순하여 신학을 전공한 뒤 목사가 되었답니다.

이 사건 이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구요, 고교 교련 과목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주민등록증도 발급하고, 실미도 684부대를 위시한 보복부대가 창설됩니다.  또한, 유격훈련 실시와 5분 대기조가 생겼으며, 천리행군 훈련을 실시함은 물론 이순신장군 동상을 설치하고 북악스카이웨이 준공과 반공 웅변대회, 육군 3사관학교 창설, 전투경찰대 창설,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청와대 근처의 통행금지, 대통령 경호 강화 및 보안 강화, 그리고 군 복무기간은 3년(36개월)으로 연장되었었습니다.

1. 21사태 소나무

백악마루에서 내려온 계단.

북악산은 청와대 뒤쪽에 있으며,  1968년 1.21 사태 이후 군사보호구역과 보안상의 문제 등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또한, 남대문(崇禮門), 동대문(興仁之門), 서대문(敦義門)과 함께 서울의 4대 문 중 하나인 북대문 숙정문(肅靖門)이 북악산 내에 있어 그동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지난 2006년 4월 1일,  북악산의 일부인 홍련사 - 숙정문 - 촛대바위의 1.1㎞ 구간이 38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2007년 4월 5일, 와룡공원에서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4.3㎞에 이르는 북악산 서울성곽 전 구간이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됩니다. 그동안 일반인의 왕래가 금지되어 온 탓에 북악산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자연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청운대는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 10월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영한 곳이랍니다.

청와대와 경복궁 부근의 시내를 볼 수 있는 곳이구요.

이 문을 나서면서 오른쪽으로 내려갑니다.

삼청안내소로 내려가요.

내려가는 계단은 길게 설치되어 있어, 발만 내딛으면 절로 내려갑니다.

쉽게 쉽게 내려간다는 거죠.

보드라운 길을 걸을 때는 여기가 집터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옹선사가 창건한 법흥사 절터랍니다.

'나옹선사' 아시죠?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의 스승이었으며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답니다.

나옹선사는 인도의 붓다, 중국의 선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말로 풀어냈던 분으로 고려는 물론,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린 고승이셨구요.

나옹선사의 시 '청산은 나를 보고(훨훨훨)'는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삼청안내소를 나와서

차도(車道)를 건너고

시내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쪽 지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경복궁 주차장을 찾아갑니다.

종로구 삼청동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기도 하고

건춘문을 지나

마침내 경복궁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둘레길.

숨 가쁘게 계단을 오르고, 산책을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걷던 서울도성 둘레길트레킹도 오늘은 여기서 이만 마칩니다.

트레킹 코스 : 무학청구아파트 - 인왕산 - 창의문 - 백악산 - 청운대 - 1. 21 사태 소나무 - 삼청공원안내소 - 경복궁주차장(7.2km, 3시간 10분, 평균속도 2.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