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

10월, 대구 [팔공산] 산행

adam53 2023. 10. 15. 21:55

2023. 10. 10

대구 팔공산을 가는 날도 새벽부터 일어났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대관령에서 불어오는 통바람을 맞으면서, 남대천 다리를 건너 버스승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5시 30분.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침침하고 어둑어둑합니다.

대구까지 가는 동안,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눈을 감아도 잠은 안오고

10시 정각,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 대구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산 73-3 원효구도의 길 제1주차장 >이죠.

주차장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와 승용차 몇대뿐입니다.

오늘 산행은 원효구도의길- 오도암- 하늘정원- 비로봉- 동봉- 동화사로 내려갑니다. 대략 10km 거리를 5시간 정도 걸을꺼에요.

팔공산은 매번, 수태골에서 시작해 오도재→ 서봉→ 오도재 비로봉→ 동봉→ 염불봉→ 염불암→ 부도암→ 동화사 후문매표소→ 동화사지구 관광단지주차장까지 약 9km를 4시간 남짓 걸었었는데,

오늘은 원효 구도의 길을 걷는다기에, 내심 기대가 큽니다.

새로운 길을 갈 때면 언제나 가슴설레죠.

이 길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하는 궁금한 마음을 안고, 주차장 반대편의 들머리에 접어듭니다.

오도암, 원효굴, 하늘정원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경치가 아주 좋다고 하던 말이 자꾸만 머리속에 맴돕니다. 

원효 구도의 길은 총 2㎞이며 주차장~오도암~하늘정원 구간에 조성됐는데, 군위군에서는 2015년 ‘하늘정원’ 탐방로 개설에 이어 2017.6월에 ‘원효 구도의 길’을 만들어 개방했습니다.

팔공산 북쪽 군위군 부계면에 속한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원효대사의 흔적을 찾아 탐방로를 낸 것이죠.

이 아치문을 지나면서 '원효구도의 길'은 시작됩니다.

산허리를 따라 새로 낸 길은 편안합니다.

동산계곡의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상쾌하구요.

산행하기에는 아주 좋은 쾌적한 아침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몸에서는 열이나고

결국은 자켓을 벗고 갑니다. 덥군요.

대구시 동구와 군위군 부계면, 경북 영천시 신녕면, 칠곡군, 경산시에 걸쳐 있는 팔공산은, 대구광역시 중심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지점에 솟아있는 대구의 진산입니다.

남쪽으로 내달리던 태백산맥이 낙동강, 금호강과 만나는 곳에 솟아,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 경산시, 칠곡군, 군위군 등 4개 시.군이 맞닿는, 경계를 이루고 있죠.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서로 20km에 걸쳐 능선이 이어지는데, 부악(父岳), 중악(中岳), 공산(公山), 동수산(棟藪山) 등 여러이름으로 불리웠고 남쪽에 문암천(門岩川), 북쪽과 동쪽에 한천(漢川), 남천(南川), 신녕천(新寧川) 등의 여러 하천과 계곡이 발달했습니다.

1980년 5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23년 5월 23일, 대한민국 23번째 국립공원이 되었습니다.

오도암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팔공산 오도암, 원효굴, 좌선대 등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를 하던 곳이고 또, 원효스님이 득도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 안들려 볼 수 없죠?

청운대 절벽 아래에 자리 잡은 아담한 암자 오도암은, 은해사 말사였다가 1960년대 초 독가촌 폐지에 따라 폐사되었답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에 들어 옛 터에 움막을 치고 자리를 잡아, 최근 문화재 복원사업을 통해 새로 지어진 암자라고 해요.

지금은 중창 중이라서 어수선합니다.

이 오도암은 654년(태종무열왕 원년) 원효(617-686)가 창건하고, 6년간 머물며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고 합니다.

오도암 뒤에 보이는 청운대.

오도암을 나와 원효굴 쪽으로 갑니다.

조금은 높고 가파른 계단.

'우와! 상당히 높은데' 했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나무계단을 올라가자 또 다른 계단이 있었는데요,

계단 714라는 글씨가 보이죠?

7백 열네개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가파른 계단을 7백개 넘게 오르려니 죽을 맛입니다.

날씨는 덥죠.

다리는 풀려서 힘이 없죠.

무거운 다리로 계단을 오르면서 진이 다 빠집니다.

천국의 계단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마지막 200계단 못 가서 오른쪽에 ‘시자굴’로 적은 표지판이 있어 그리로 가 봅니다.

굴이라기 보다는 바위가 움푹 패인 작은 굴인데 깊이도 얼마되지 않는, 바위가 깨어져서 떨어져 나간 그런 곳.  

굴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곳이지만, 원효스님을 모시고 받들던 시자가 있던 곳이라고 ' 侍者굴'이라 하는 건가 봅니다.

계단 쉼터에서 바라 본 풍경.

원효굴로 갑니다.

청운대 절벽 중간에 있는 원효굴 가는 길은 데크를 만들어놓아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기이한 모양의 바위를 보면서 가요.

원효굴 앞에는 조금 여유있는 공간(데크)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 굴은 원효가 수도한 곳이라고 해서 원효굴이라 불리우는데요,  

원효굴의 바닥에는 바위틈에서 솟아난 물이 고여 있고, 사람이 눞고도 남을 정도로 생각보다 굴은 여유있고(?) 깊은 편입니다.

또, 원효보다 약 20여년 앞서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기도하며 이 물을 마셨다는 전승이 있어, 장군수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해요. (김유신장군은 원효보다 22살 더 많다고 하죠.)

원효굴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멋집니다.

714계단을 올랐습니다. 야호~

하늘정원으로 가는 계단

청운대 가는 길

하늘정원 가는 길에는 군부대가 있어,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습니다.

위 2장의 사진은, 이해를 돕기위해 다른 이의 것을 빌려온 것입니다.

저기에 하늘정원의 정자 그리고 산봉우리끝의 전망대가 보이네요.

하늘정원에 왔습니다.

하늘정원 억새와 쑥부쟁이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군요.

팔공산 탐방로는 대구에서 접근할 수 있었을 뿐, 군위 지역에서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 전무했답니다.

한국동란 이후 군사시설과 통신시설이 설치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거죠.   비로봉 정상도 2009년에 개방됐다고 합니다.

경북 군위군은  2014. 11월 군사 시설에 가로막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팔공산 정상 비로봉(해발 1193m) 주변에 공원을 조성했는데요,

하늘정원은 행정구역상 경북 영천에 위치한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600여m 떨어 진 곳에 4천 700여㎡ 규모로 조성했다고 해요.

대구와 경북 군위·영천·경산 등의 경계 역할을 하는 팔공산은 비로봉이 가장 높지만, 군사시설과 송전탑 등에 가로막혀 일반인의 출입은 그동안 동봉(해발 1,155 m)까지만 허용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위군은 군부대 등과 협의한 끝에 군부대로 사용되어온 부지 일부를 분할, 하늘정원을 만들었다는 군요.

하늘정원 전망대에서 바라 본 청운대.

청운대의 주상절리

하늘정원에는 구절초가 피었습니다.

비로봉으로 갑니다.

비로봉으로 가는 길에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햇빛은 따사로이 억새를 어루만져줍니다.

비로봉 송신탑들이 가까이 보이면 정상에 거의 다 온 거죠.

비로봉에 다 왔군요. 300m 남았대요.

비로봉 부근에는 송신탑이 여러개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에서의 경관을 해치긴 합니다만 어찌합니까? 이건 꼭 필요한 시설물인걸...

쑥과 비슷한 이파리와 취나물 종류를 뜻하는 방언 '부지깽이나물'에서 유래된 부쟁이를 합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쑥부쟁이'

 

쑥부쟁이 / 이명주

 

솔향기 그늘 아래

다소곳 둘러앉아

임 소식 기다리는

보랏빛 가을 내음

알싸한

향기에 취해

아이처럼 해맑다.

 

가녀린 허리춤에

손 살짝 올려놓고

바람에 살래살래

춤사위 눈부시다

그 모습

내 임을 닮아

가는 발길 멈춘다.

팔공산 정상입니다.

1,193m 높이의 비로봉.

우리나라의 산 정상에는 '비로봉'이 참 많습니다.  오대산, 소백산, 팔공산, 속리산, 치악산 등 이름있는 산 정상의 비로봉이라는 이름은 '비로자나불'에서 따 온 말인데요,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어로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입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이며 부처의 진신을 이르는 말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해요. 

정상바로 아래의 테크에서 점심을 먹고, 과일도 먹고

동봉쪽으로 내려갑니다.

동봉으로 가는 길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죠.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 표면이 풍화된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해요.

그래서 대구시는 이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을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했습니다.

동봉에 왔습니다.

비로봉에서 동봉까지는 400m 정도.

동봉은 '미타봉'이라고도 하죠.   아미타부처님의 준말.

전망대에서 둘러 본 주위의 산 들.

팔공산은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팔공산'하면 빼놓을수 없는게 바로 왕건과 견훤의 '공산전투'이죠.

고려 태조 10년인 서기 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지금의 문경과 영천을 빼앗은 뒤 신라의 경주로 군사를 밀고 처들어가자, 신라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태조 왕건은 신라를 돕기위해 부랴부랴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왕건의 군사들이 경주에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하였으며,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 )를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입니다.

이후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잡고, 신라의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는데요,

왕건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하였으며 태조도 간신히 몸을 피했다고 해요.

다급하게 경주로 향하던 왕건과 군사들이 팔공산에 이르렀을 때, 

팔공산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매복을 하고, 왕건이 오기를 기다리던 견훤의 군사들에게 고려군이 대패를 하게된 "공산동수전투"에서 신숭겸이 왕건의 어복(御服)을 입고 싸우다 목이 잘려 죽었으며, 이틈을 타 왕건은 무사히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왕건을 피신시킨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장군을 비롯한 충신 8명.

통일을 이룩한 후 '왕건'은 그 8명의 충신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 산을 팔 공산(八 公山)이라 했다고 한답니다. 

이런 역사적인 무대가 되었던 대구 팔공산 인근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데요,

'군위'는 태조왕건이 이 곳에서 군사 사열을 받았는데 위세가 좋다하여 지어진 지명이며,

'안지랑'은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여기에 숨어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 갔다고 하여 지어졌대요.

'불로동'은 왕건이 도망가다가 이 곳에 이르러 보니, 노인들은 피난을 가고 아이들만 남아있어 지어진 지명이며,

'지묘동'은 신숭겸의 뛰어난 지혜와 묘책으로 태조왕건을 구했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 합니다.

그외에도 '무태'는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현재 서변동, 연경동 등지로 진군하고 있을때,  왕건이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 당부했다 해서 이름 지어졌으며,

'반야월'은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지금의 반야월에 도착하자 밤은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안심'은 이 곳에 와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이고,

 '달비골(달배골)'은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하고 앞산으로 숨어든 왕건이, 크고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왕건의 등을 비추었다 하여 이름 지어졌으며, '팔공산'은 앞서 말했듯이 태조 왕건의 8명의 충신이 순절한 산이라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고 합니다.

나무숲에 숨은 듯한 큰 바위들은 팔공산을 더욱 멋지게 합니다.

때때로 가파른 길이 나타나지만

사방이 탁 트인 바위 위에 서면 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자연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공연장같은 쉼터

 

작은 무대도 있군요.

그림같은 풍광은 발길을 더디게 하고

아름다운 단풍도 발길을 붙잡습니다.

갈림길입니다.

직진하면 갓바위로 가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동화사로 가는 길이죠.

우리는 동화사 방면으로 내려갑니다.

길이 좀 좋지않군요!

하산하는 길은 무조건 왼쪽 소롯길로 갑니다.

산을 다 내려왔을 때 '부도암'을 지나고

부도암에 아주 잠깐 들렸다가 동화사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동화사까지는 계속 포장도로를 걷고...

동화사 입구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봉서루를 지나야 대웅전으로 갈 수 있는데요, '봉서루'는 봉황의 기운이 서린 누각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인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해요.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의 중창에 세워진 건물인데,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천태각(天台閣)·영산전(靈山殿)·봉서루(鳳棲樓)·심검당(尋劍堂)·칠성각·산신각 등의 여러 당우중에서 '대웅전'은, 1606년 학인(學人)이 건립한 것을 1677년 상언(尙彦)이 중수하고, 1727년 천순·홍재·의회가 중수하였다고 해요.

이곳에 모셔놓은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王峻)이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광해군 12)에 의현(義玄)이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며, 이 밖에도 삼장탱화(三藏幀畵)·제석탱화(帝釋幀畵) 등이 있으며,

대웅전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절은 한때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며, 서사원(徐思遠)이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호국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이제 통일대불을 보러갑니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은  1992년 11월에 완공했는데요,

높이는 약 33m, 둘레는16,5m 된다고 해요.

석불의 몸체 안에는 미얀마 정부가 기증한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모셨고, 대불앞에는 국내 최대규모인 17m의 석탑 2기와  7.6m의 석등을 세웠구요.

법화보궁을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동화사와 팔공산 산행을 모두 마칩니다. 

터널 밖 주차장까지  총 17.3km를 걸었군요. 7시간 30분이 소요되었으며 평균속도는 2.3km 였습니다.

산행코스: 원효구도의 길 주차장 - 오도암 - 714계단 - 원효굴 - 하늘정원 - 비로봉 - 동봉 - 동화사 (9.1km, 4시간 50분,  평균속도 1.9km)

팔공산[八公山] 

 

대구를 대표하는 산인 팔공산,대구광역시 동구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군위군 부계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193m.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됨.

팔공산의 이름은 신라시대에는 [중악] [부악] [공산] 이라고 했고,고려시대에는 [공산] 조선시대에 들어서부터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팔공산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통일구상을 하면서 수행했던 곳이며,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원래 산의 명칭은 공산이라고 불렀는데 신숭겸을 포함한 고려의 개국공신 8명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八公山)이라고 불렀다.

공산전투라고 해서

.신라말에 견훤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 동수에서 견훤에게 포위 당하였다.

그 때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이 때 신숭겸·김락,전의갑,전이갑,김철, ,호원보,,전락,,손행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 해안(解顔)역의 유래는 '얼굴을 폈다' 라는 의미인데,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뒤쫓아오는 후백제군을 피해 도주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야 분한 얼굴을 풀었다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반야월(半夜月)은 후백제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왕건이 자신의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 반달을 보고 이곳을 반야월(半夜月)이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안심(安心)은 왕건이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야 안심했다는데서 안심(安心)이란 지명이 유래된 것이다.

왕건이 대구 앞산에 도달, 앞산 은적사(隱跡寺) 근처에서 사흘동안 몸을 숨기게 되는데 이후 이곳에 은적사가 세워지게 되며, 인근 안일사(安逸寺)라는 절에서도 쉬게 되는데 이곳도 왕건이 편히 쉬었다 갔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파군재 남쪽 산기슭인 봉무동 노인정 개천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태조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잠시 걸터앉아서 쉬었던 곳이어서 독좌암(獨坐岩), 도망치다 들른 마을에 어른은 한명도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고 해서 불로동(不老洞)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밖에도

• 여덟고을에 걸친 산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 신라 헌덕왕때 심지대사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8간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고 해서

(간자:미륵보살의 수계(受戒불교를 받드는 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戒律)에 따를 것을 맹세하는 것)를 의미하는 징표. 진표가 받은 간자는 미륵보살의 손가락 뼈라고)

• 원효대사의 100명 제재 가운데 8분이 득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라는 설이 있다.

공산은 꿩치 자를 썼던 치성화라는 지명에서부터 이름을 따온 것인데 꿩을 꽁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공으로 변해서 공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