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9
속리산으로 가는 오늘도, 먼동이 트지않은 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깊은 잠에서 채 깨지않은 어두운 골목에는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와 새벽 찬공기만이 가득합니다.
6시.
안개는 地面 가까이 내려오면서 산허리를 감싸고, 하늘도 뿌옇게 가리고 있습니다.
2018년 4월, 그때는 갈령 - 형제봉 - 피앗재 - 천황봉 - 신선대 - 문장대 - 화북주차장까지 16km를 8시간 30분동안 걸었댔죠.
오늘은 화북분소 - 문장대 - 관음암 - 세심정 - 법주사 - 주차장까지 11km를 6시간가량 걸을 예정입니다.
속리산국립공원은 중부내륙 지방에 위치하고, 1970년 3월 24일 국내에서 6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총면적은 274.76km나 된답니다.
백두대간의 맥을 잇는 산으로 한남금북정맥 시작점에 위치하며,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와 문경시 경계에 걸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경북 상주시에서 충북 보은군으로 넘어갑니다.
거의 다 왔네요.
9시 40분
화북분소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단체사진 한 장은 남겨야죠?
넓은 주차장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 뿐.
주차장에서 이 계단을 올라가
나란히 줄 맞춰서 인도(人道)를 걸어갑니다.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숲길이 나오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리 넉넉치 못한 산행시간 때문에, 늘 그랬듯이 길 바로옆에 있는 '성불사'를 들려보지 못하고 문장대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길 가다가 만나는 어느 절이든 마당에 들어서면, 고즈녁한 분위기가 좋아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오늘도 그냥 지나갑니다.
부처님을 친견하면 힘이 나서 산행하는 게 덜 힘들텐데...
화북분소에서 문장대까지는 거리가 짧은 대신 길은 가파릅니다.
예전에 내려올 때는 몰랐는데, 오늘은 올라갈려니 무척 힘드네요.
힘들게 하는 것에는 아직까지 무더운 날씨도 한 몫하고
화강암 기반의 돌산인 속리산은, 화강암의 특성인 흰 빛의 둥근 멋을 보이는 수려한 풍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과 계곡, 기암과 폭포 등이 산재해 있고 자연과 조화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속에 2,5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해요.
속리산은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세로 유명했으며,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봉산으로도 불렸답니다.
오래전부터 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미지산(彌智山)·구봉산(九峯山)·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자하산(紫霞山)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 속리산은,“속리산(俗離山)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컬었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요.
쫑긋한 강아지 귀처럼 생긴 이 바위로 일행들이 갑니다.
멋진 곳이라서 사진을 찍는대요.
여기는 힘든 산길을 오르다 쉬어간다고 '쉴바위'라 한다던데...
등산로 옆 개울 물 소리는 시원스레 들려오는데, 아침나절인데도 온 몸은 땀에 젖어갑니다.
속리산은 신라 시대부터 국가에서 산신제를 올릴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던 명산이랍니다.
구봉산으로 불리던 시절, 진표율사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는데,
이걸 본 사람들이 짐승도 부처를 알아보는데 하물며 사람이 이를 깨닫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며 머리를 자르고 산으로 들어갔답니다.
이때부터 세속 속(俗), 떠날 리(離)라 하여,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들어온 곳이라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해요.
꽃이 피고 난 뒤 죽어버린 조릿대 사잇길로 올라갑니다.
대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100년에 단 한 번 꽃이 핀다고 하지만 빠른 것은 3~4년, 보통은 60년에서 120년 만에 피는 것도 있답니다. 그러나 꽃이 피면 대나무는 죽습니다.
대나무는 하나가 꽃을 피우면 모든 대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우고 모두 다 죽어버리는데, 꽃이 핀 후에 말라죽는 이 현상을 개화병(開花病)이라고 한대요.
대나무류는 이처럼 꽃이 피는 병에 걸려 죽는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대개 군락을 형성하는데, 많은 대나무가 한 곳에서 오랫동안 번식하면 땅속의 영양분이 부족해지죠. 게다가 죽순이 자랄 땐 하루에 1미터도 넘게 자라니 그만큼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고, 결국 땅속의 영양분이 전부 고갈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뿌리로 번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대나무는 꽃을 피웁니다.
뿌리 대신 씨앗으로 번식하기 위해 꽃을 피우고 죽어버리는거죠.
문장대로 가는 이 길에는 사진에서 보듯, 죽은 조릿대가 종종 눈에 띕니다.
등산로 초입부터 문장대까지 등산로 옆으로는 개울이 있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더위를 잊게합니다.
바람까지 분다면 더 시원한 기분일텐데, 아쉽게도 바람한 점 없는 습(濕)하고 더운날씨는 비 오기 직전의 그 욹히는 날씨같습니다.
지금은 도정을 할 때 방앗간에서 돌을 다 걸러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해서 쌀에는 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지을 때는 조리로 쌀을 일어서 밥을 했는데요, 이 돌을 걸러내는 기구를 '조리'라 했습니다. 조릿대는 조리를 만드는 키 작은 대나무를 말하는 것이구요.
새해가 되면 복을 쓸어담는다고 조릿대로 만든 '복조리'를 사서 걸어두기도 했었죠.
그리고 조릿대의 잎과 줄기는 약재로 쓰이는데 특히 잎은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동의보감에는 열을 내리고 염증을 없애며, 소변을 잘 보게 하기도 하고 위열로 인한 토혈, 코피, 소변출혈 등 각종 출혈증상을 치료한다고 했다는군요. 혈당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어 당뇨환자에게도 좋다고 해요.
그러나 조릿대는 누구나 막 먹어도 되는 게 아니랍니다. 찬 성질이 있어서 저혈압이나 몸이 찬 사람은 않 좋답니다. 부작용이 있기에 제대로, 확실히 알고 먹어야 한다고 해요.
소화를 돕고 혈압을 조절하며 피로회복 효과도 있다는 이 조릿대는 우리나라 전국각지에 분포하는데요,
대나무나 조릿대는 나무가 아니라,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 풀이랍니다.
개울은 문장대까지 이어지는가 봅니다.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요.
가을이 다가오면서 매미도 이젠 더 이상 울지않습니다.
풀벌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구요.
들리는 건 물 소리 뿐.
큰나무 밑에서 땅속 줄기로 뻗어나가 빽빽히 자라는 조릿대. 그래서 조릿대가 있는 곳에서 다른 식물은 살지 못합니다.
조릿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대나무로, 산에서 자란다고 산죽(山竹)이라고도 합니다.
등산로 주변은 온통 조릿대가 장악을 해버렸네요.
짧으면서도 힘든 오르막도 이제 끝나갑니다.
보세요. 하늘이 환 ~ 하잖아요.
문장대 가기 직전의 갈림길, 쉼터가 있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문장대는 200m 더 가면 됩니다.
깊은 숨이 휴~ 쉬어집니다. 다 올라왔다는 안도감이겠죠.
왼쪽은 법주사로, 오른쪽은 문장대로 가는 갈림길에서 몇몇은 배낭을 벗어놓고 문장대로 갑니다.
'어차피 여기로 다시 올 걸, 궂이 무겁게 배낭을 메고 갈게 뭐 있어?
점심밥도 여기서 먹을건데' 그러는 거죠.
돌 틈바구니엔 쑥부쟁이가 피었습니다.
쑥부쟁이는 8월~10월에 피는 연한 보라색의 꽃으로,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꽃도 가지마다 가득 피어나서 그 무게 때문에 땅에 비스듬히 누워 자라는 것이 대부분이죠.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는 구절초가 있는데요,
구절초 꽃은 흰색, 연분홍색으로 산과 숲에서 자라는데, 가지를 많이 뻗지않아 꽃도 한,두송이 핍니다.
국화향이 짙어, 처음 본다고 해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죠.
벌개미취도 있네요.
벌개미취는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연보라색꽃이 피는데 원래는 깊은 산에서 자라는 걸 요즘은 원예종으로 정착한 꽃입니다.. 한국 특산식물인 벌개미취는 고려쑥부쟁이라고도 하는데 벌판에 피는 개미취라고 '벌개미취'라는 이름을 얻었답니다.
꽃은 구절초와 쑥부쟁이보다 더 크고, 잎은 진하면서 크고 무성하게 자랍니다.
무식한 놈 /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문장대에 왔습니다.
속리산의 백미는 이 '문장대'입니다.
철계단을 올라가 봅시다.
속리산 자체만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사실 속리산 국립공원은 매우 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백악산, 묘봉, 칠보산, 대야산, 군자산 같은 산들도 속리산 국립공원의 영역 내에 포함되는데 이 산들도 풍광이 매우 빼어납니다.
그리고 국립공원 영역 바로 밖에도 희양산, 구병산, 청화산, 조항산 같은 산들이 새하얀 암벽을 뽐내며 들어서 있는 등, 속리산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빼어나기 때문에 정상과 문장대에서의 조망도 매우 좋습니다.
문장대(文藏臺)는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사이에 있는 1,054m의 봉우리입니다.
속리산을 대표하는 자연경관 중 하나로, 산 정상에 바위로 석대를 쌓아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죠.
문장대는 본래 구름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雲藏臺) 불리었으나,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 하였을 때 신하들과 이곳에 올라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고 해요.
문장대 암봉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봅니다.
사방이 탁 트여서 가릴 것 하나없는데 흐릿한 날씨 때문에 멋진 풍경은,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군요.
그래도 그 풍경들이 어디가나요?
볼 수록 멋진 모습입니다.
가슴속이 뻥 뚫린 듯한 상쾌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갑니다.
12시군요.
갈림길의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갑니다.
신선대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문장대를 돌아봅니다.
언제 또 여기를 찾아올 날이 있을까 하는생각을 하며....
신선대로 가는 길은 지금 등산로 정비가 한창입니다.
워낙 가파른 길이기에 계단을 설치하려는 거죠.
가팔라도 너무 가팔라서 하루라도 빨리 계단을 설치했음 좋겠더라구요.
예전에는 이 길을 어떻게 올라왔었는지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아마도 헥헥하며 죽을 힘을 다해 올랐겠지요!
뒤돌아 본 돌계단
경치는 아주 그만입니다.
그야말로 죽여주네요.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세라 발밑에 온 신경을 쓰며 걷다보니 신선대에 왔습니다.
천왕봉까지 2.3km 남았다는데, 천왕봉은 패쓰합니다.
예전에 천왕봉을 들려서 온 것도 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에 지친데다가, 오늘따라 왜 그런지 너무 힘들거든요.
신선대 쉼터앞의 바위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암봉들.
신선대 산봉우리
신선대 쉼터에는 지친 등산객들에게 물과 라면같은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습니다.
神仙臺(1,025m)유래에는 전해오는 얘기가 있죠.
한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있는데, 건너편 산봉우리 바위에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가 봤더니만 아무도 없어 되돌아와 보니 여전히 10여명의 신선들이 담소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 곳을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라 부르게 되었다네요.
경업대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저 앞에 사람들이 있는 곳이 경업대에요.
바위가 경사져서 조금은 조심스러운데도 사진을 찍는군요.
여기는 무조건 찍어야한다고 해서 한 장 남겨봅니다.
저 앞의 삐쭉 솟은 바위는 '입석대'랍니다.
이 돌계단 위에서 보이는 저 멋진 산봉우리는
좀 전에 지나왔던 '신선대'이구요.
사진을 찍던, 여기는 경업대입니다.
계단 가파른 거 좀 봐요!
문장대에서 신선대, 법주사로 가는 길은 이 처럼 계단이 있던 없던, 아주 아주 가파른 길의 연속입니다.
관음암 갈림길입니다.
오른쪽에 두 여인이 있는 곳으로 200m 쯤 가면 관음암이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조용히 수행하려 하는데, 등산객들 때문에 방해되니까 출입을 못하게 하는 거겠죠?
세상이 당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지마라.
세상은 당신에게 빚진 게 없다. 세상은 당신보다 먼저 여기에 있었다.
- 미국의 목사 로버트 버디트 (1844~1914) 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나의 삶을, 우리의 삶을 책임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거죠.
술 한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서 여름은 차츰 차츰 저멀리 가고 있습니다.
봄이 오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세월은 무심하게 그냥 오고가고 그냥 가고 옵니다.
비에 젖은 듯 땀에 흠뻑 젖어 걷는 오늘도, 찬 바람 불어대는 겨울이 오면 마냥 그리운 추억이 되겠죠!
속리산을 다 내려와, 비로산장까지 왔습니다.
비로산장 앞도 한창 등산로정비를 하고 있네요.
'세조길'로 접어듭니다.
세조길은 조선 7대 세조가 온양온천으로 요양차 가던 길에, 스승인 신미대사가 머물고 있는 복천암을 방문하기 위해 오간 순행길입니다
2016년 9월 개통된 세조길은 저수지와 계곡을 따라 남여노소 누구나, 휠체어와 유모차를 끌고서도 다닐 수 있게 완만하게 조성한 길입니다.
물에 비치는 산그림자를 보다보면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런 현상은 낙엽이 저수지바닥에 쌓여 분해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산지 저수지나 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답니다.
빽빽히 붉은꽃을 피운 여뀌 종류. 장대여뀌 같은데 확실치 않습니다.
여뀌들은 주로 전국각지 습지나 냇가에 자라는데 잎을 씹으면 매운맛이 나죠, 줄기에 독성이 있어서 물고기의 아가미를 마비시키므로 옛날에는 천렵을 할 때 여뀌를 짓찧어 즙을 냇물에 풀고서 기절해 떠오른 물고기들을 주워담기도 했습니다.
법주사에 다 와 갑니다.
이 건물은 템플스테이 하는 곳이라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법주사 경내를 잠시 돌아봅니다.
어찌 어찌하다 보니 맨꼴찌가 되었기에, 법주사도 찬찬히 돌아보지 못하고 대충 대충 서너군데만 봅니다.
일단은 금강문을 들어가야죠.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천왕문이 있는데요, 전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사천왕문은 신라 553년(진흥왕 14)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었나 봅디다. '사천왕문'은 고려 말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 당시에는 금강역사가 있는 금강문으로 봤나보죠.
사천왕문 왼쪽에는 금동미륵대불이 있는데요, 현재의 대불이 있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답니다.
신라 혜공왕 12년(서기776)에 진표율사가 7년 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했었지만, 조선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한다고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었답니다.
1939년에 장석상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하에 김복진 조각가에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 동란으로 중단 되었구요, 1963년 박추남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 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대요.
그후 1986 류월단 주지스님 때,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구요.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성공 개최 및 세계 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 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해서, 2년여의 노력끝에 본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법회를 갖게 되었답니다.
이 대불(大佛)은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 도금면적 990m2에 황금 8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 명이었대요.
법주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팔상전(捌相殿)입니다.
삼국시대부터 많은 목탑이 세워졌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고 해요.
국보제55호인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임진왜란때 불에 탄 것을 선조 38년(1605) ~ 인조 4년(1626)에 걸쳐 벽암대사가 주관하여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목탑이지만 위로 올라갈 수는 없고, 내부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8상 탱화를 모셔놓았기에 팔상전이라고 부른대요.
팔상전 옆의 석등(石燈)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성덕왕 19년(720)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합천의 영암사터,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중흥사 쌍사자석등 보다도 3.3m의 높이로 규모도 가장 크고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입으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사자 2마리.
보물 915호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건립한 것을, 776년(혜공왕 12)에는 진표율사가 고쳐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난 뒤 인조 26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었답니다.
이 대웅보전은 높이가 약 19m, 면적이 402.80평방미터나 되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며, 이 같은 수법의 건물로는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고 해요.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고 한 것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들어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불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랍니다.
법주사 대웅보전에는 보물 1360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는 아미타불,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이 있구요.
인조 4년(1626)에 玄眞, 淸憲, 衍默, 양묵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새로 금칠을 했다고 해요.
이 비로자나불은 높이가 5.5m, 허리둘레 3.9m나 되는 국내 소조불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합니다.
오늘도 내부의 사진은 찍지않았기에, 삼존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네요.
진영각과 명부전
국보 석련지(石蓮池)는 신라 성덕왕 19년(720)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 조형물로,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 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연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랍니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고 해요. 표면은 연꽃무늬를 돌아가며 새겼구요.
금강문으로 나가기 전 석련지 오른쪽으로 보면 커다란 바위 2개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여래좌상도 보물입니다.
법주사에는 국보와 보물이 참 많습니다.
쌍사자 석등(국보, 1962년 지정), 팔상전(국보, 1962년 지정), 석련지(국보, 1962년 지정), 사천왕 석등(보물, 1963년 지정), 마애여래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대웅보전(보물, 1987년 지정), 원통보전(보물, 1987년 지정), 신법 천문도 병풍(보물, 1985년 지정), 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2003년 지정),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2003년 지정) 등이 있다는데
찬찬히 둘러보지 못하고 법주사를 떠납니다.
시간이 여유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요.
그리곤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픈 걸 참아가면서 상가를 지나 대형주차장까지 지루한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걸었던 거리는 12.7km였으며 소요시간은 5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평균속도는 2.3km였구요.
속리산 산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산행코스 : 화북분소 - 문장대 - 신선대 - 세심정 - 법주사 (12,7km, 5시간 40분 소요)
길가의 정이품송도 보았습니다.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제103호라고 해요.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탔던 가마가 이 소나무의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 행차를 도왔고, 세조가 이 소나무 덕에 어가 행렬을 잘 마칠 수 있었다며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죠.
원추형의 웅장한 형상이 매우 아름다운 나무가, 1993년 강풍으로 서쪽 가지가 부러져서 나무의 생기가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수형(樹形)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찍은 정이품송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안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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