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8
남한산성을 갑니다.
산행을 막 시작하던 무렵에 두어번 간 적이 있었던 이후로, 오랜만에 가 보는 남한산성입니다.
오늘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산성로터리에서 출발한 후 북문을 거쳐, 벌봉과 봉암성을 지나 동문과 남문을 들린 다음 북문으로 돌아올 계획입니다. 꼭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11km를 5시간에 걸쳐서 걸을려고 합니다.
09시 35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58-1, 남한산성 행궁 앞 회전로터리 앞에서 하차 후 행궁으로 가 봅니다.
여기는 눈이 아주 많이 내렸어요.
3월 중순인 지금에 아직도 깊은 겨울인 양, 흰 눈이 수북이 내려쌓였습니다.
행궁은 왕이 늘 거처하는 궁궐을 떠나서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別宮)입니다.
즉,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하는데,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고 해요.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5일간 항전하였습니다.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고 하죠.
남한산성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었는데,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을 준공하고 2004년 행궁 좌전을 준공하였답니다.
2007년 1월 1일부로 남한산성 입장요금이 폐지되었지만, 행궁은 관람료를 받습니다.
하지만 10시부터 행궁 입장을 할 수 있기에 시간을 아껴야 하는 우리들은, 행궁 관람은 생략하고 곧바로 성곽길을 걷기로 했죠.
한남루는 상, 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의 누각입니다.
정조 22년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한남루라는 누문을 대문으로 세웠으나 20세기 초반에 붕괴되었었대요.
'한남루'란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며, 프랑스 영사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2011년 같은 위치에 지금의 한남루를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행궁앞에서 회전교차로로 돌아와 북문으로 가려는데, 언덕위의 그림같은 정자가 자꾸만 눈에 들어와 들려보기로 합니다.
온 천지를 하얗게 덮어버린 눈 세상은 눈길 닿는 곳마다 그림입니다.
이 정자는 침괘정이라는 군요.
무기제작소로 알려졌었지만, 건물 구조로 보면 집무실로 사용했을 꺼라고 추정한다죠.
침괘정에서 내려와, 음식점과 카페가 줄지어 있는 도로를 따라 갑니다.
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길이 있기도 한데, 이쪽 길은 북문을 거치지 않고 '국청사'절을 지나 수어장대로 가는 지름길이라기에, 되돌아서서 가던 길로 곧장 올라갑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국청사를 들려보는 것도 좋을 듯 한데...
1625년(인조 3) 전국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국청사입니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입니다.
그 뒤 한말에 의병의 군기 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일단은 북문을 들렸다 가야죠.
차단기옆으로 돌아서 곧장갑니다.
북문에 왔습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입니다.
싸움에 패하지 않과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고도 하죠.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했다고 합니다.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고 해요.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하죠.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북문은 인조 2년에 신축한 성문일것이랍니다.
출입문인 홍예도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크고 넓은데, 아마도 북문으로 적의 위협이 많지 않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만든 것으로 본답니다.
문루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읍성의 문루와 비슷하구요.
북문을 지나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원래는 북문부터 시작해서 성곽길을 걸을 예정이었는데, 꾀를 부려 편한 길을 택해서 가는 겁니다.
길옆 나뭇가지들이 흰눈을 흠뻑 덮어 쓴 모습은 환상적입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눈 산행을 다녀봤지만 바닥에 깔린 눈만 보았을 뿐인데, 겨울가고 봄이 오고 있는 이 즈음에 남한산성에 와서 제대로 된 눈꽃을 봅니다. 횡재를 한 것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와!' 연신 탄성을 내지르며 겨울왕국으로 들어갑니다.
눈 덮힌 소나무와 길게 이어진 성곽은 아름다운 그림 한폭입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山城)으로 경기도의 도립공원이기도 하죠.
병자호란 때 조선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이며, 1950년대에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하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이 이곳에서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청에게 항복한 치욕스런 과거가 있는 곳입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 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1627년 (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기를 또한, 사죄를 요구하였었죠.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 태종 홍타이지(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는데,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당시 성 안에는 13,000 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4,300여석과 소금 90여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구요.
靑軍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해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고,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해요.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는데,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고,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 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답니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2월 24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답니다.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았다고 하는데, 삼궤구고두는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이었습니다.
이후 남한산성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이후 조선은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궁사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형태로 체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 문루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답니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아마도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한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죠.
남한산성은 한국전쟁 때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된 것을, 1975년부터성벽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1997년 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고 해요.
1963년 1월 21일에는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답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답니다.
수어장대에 들려봅니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하죠.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라고 불렸답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천부사)'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구요. 이후 영조 27년(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하는데요, 헌종 2년(1836년)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중수하였고,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랍니다.
수어장대 담장 곁의 향나무.
수령이 400년이 넘은 보호수입니다.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시설로,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어장대 옆에는 작은 보호각이 하나 있는데, 무망루(無忘樓)입니다.
그러니까 수어장대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던 것을 별도의 보호각을 지어서 보호하고 관리하고 있는거죠.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8년간 볼모로 있다가 돌아와서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英祖)가 이름 지은 것이라 합니다.
보호각 옆 나무는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라 쓴 돌이 있는데요, 1950년대 남한산성을 공원으로 지정한 이승만대통령이 여기를 방문하고 기념 식수를 한 것인가 봅디다.
'무망루' 보호각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인 수어장대.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하는데요,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하죠.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한데,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합니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上使)에 해당하였다 해요.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 화동의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하게 하였다죠.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 19년(1795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했답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관리되어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구요.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장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수어장대 마당의 숫눈길을 밟으며 돌아보다가 밖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청량당'이 보입니다.
청량당(淸凉堂)은 '이회(李晦)와 그의 妻妾을 모신 祠堂으로 수어장대 입구에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회'는 인조2년(1624)에 南漢山城 축성(築城)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내에 마치지 못했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을 당했는데, 후일 그의 무죄가 밝혀져서 수어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넋을 달랬다고 합니다.
수어장대를 뒤로 하고, 남문 방향으로 향하는데
길 오른편에 계단이 있어 '뭐가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안고 올라가 봅니다.
아무런 설명문도 없는 돌로 만든 원판이 있군요.
간단하게라도 안내문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으로 계단을 내려옵니다.
1.4km를 가면 남문이 있습니다.
남문은 포장도로를 따라 쭈욱 내려가도 되고, 성벽을 따라가도 됩니다.
성벽을 따라서 갑니다.
저기 저 앞에 있는 노란색 '출입금지'판을 세워놓은 곳은, 도로를 내려가다가 성벽과 합류하는 곳입니다.
걷는 사람 마음이죠.
평탄한 길 따라 가던가, 성벽을 따라가던가 2개의 길은 결국 남문으로 가거든요.
만리장성처럼 끝이 없을 것 같은 성곽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한때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하남위례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晝長城), 일장성(日長城))이라는 설도 있는데요,
조선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죠.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했답니다.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답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하죠.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나무기둥에 밧줄로 울타리를 친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게 바로 군포지(軍鋪址)인데요,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라고 합니다.
'중정남한지(1847)에 따르면 남한산성 안에는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발굴조사 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위에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축물이었다고 해요.
걷다보면 눈 쌓인 산이 보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산은 검단산이라고 해요.
남문(至和門)까지 왔습니다.
루(樓)에서 내려다 본 도로에는, 수어장대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간 빨간 옷의 일행이 보입니다.
누각에서 내려와 남문 정면을 봅니다. 문앞의 남문에 대한 안내문도 읽어보고 가요.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성남에서 올라오는 출입문인 남문이 제일 큰 규모로 실제 남한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서울 송파나루와 연결되는 서문은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길이 험하여 암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남문은 지금도 이곳으로 도로가 성남과 연결되기 때문에 제일 평탄한 길이라 할 수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의 성문은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부터 지화문(至和門)이라 했다고 해요.
다시 위로 올라와 성곽을 따라 걷습니다.
나무와 산성에 소복히 내린 이 풍경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남장대 터에 왔습니다.
제2남옹성 입구의 남장대는 남한산성에 설치된 5개 장대의 하나입니다.
남쪽에 있어 '남장대'라 하는데,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의 5개 영 중 진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라 해요.
1788년 광주부윤 '이태영'이 수어장대와 이곳을 2층 규모로 증축하고 '타운루'라는 편액을 걸었고, 19세기 후반 이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두다 떠내려가고 남장대를 받치던 추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제2남옹성치 끝으로 가 봅니다.
치(치성, 성치)는 성곽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곽앞에 돌출시킨 부분으로, 고구려가 개발한 축성 방식이랍니다. 고구려 축성술은 백제와 신라, 고려, 발해, 금 그리고 조선은 물론 중원대륙의 여러나라, 북방민족에도 널리 전파되었대요.
남한산성에는 5개의 '치'를 두었는데, 남한산성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구요.
제2남옹성치는 남장대앞에 지었는데, 남한산성은 대체로 성곽이 크게 굴곡지고 경사가 있는 곳에 있어서 '치'가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남쪽 성곽인 남문, 제1~3남옹성 그리고 동문은 굴곡이 별로 없고 경사가 완만한 곳이 많아서 '치'를 만들어서 방어력의 증대를 꾀했다고 해요.
남옹성치에서 검단산과 제2남옹성을 바라봅니다.
산성둘레길을 조금 짧게 걷는다면 남옹성을 들려봐도 좋겠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둘레길을 거의 다 걷는 상태라 시간이 넉넉치 못해 그냥 바라보는 걸로 끝냅니다.
제2남옹성의 둘레는 318m나 되며 남한산성의 옹성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또한 다른 옹성과 달리 2중으로 되어있으며 옹성끝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으며 포대는 동, 서, 남 3방향으로 있습니다.
본성(제남옹성치, 남장대)과 연결되는 부분에는 암문을 설치해서 서로를 이어주는데, 만약 이 옹성이 적에게 넘어가면 암문을 막고 제2남옹성치에서 맹렬한 공격을 할 수 있답니다.
이정표와 의자가 있는 뒷편에는, 남장대의 주춧돌이 남아 있습니다.
성벽과 군포지를 지나
엄청 가파른 계단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려갑니다.
사람들이 밟은 자리는 미끄러워서 신경을 바짝쓰고 가야 하거든요.
성곽은 끝없이 이어지고
성벽을 따라 걷는 마음은 마냥 행복해집니다.
해(太陽)를 품고 있는 것처럼 가슴속이 환해져오고, 즐거운 마음에 샘이 솟듯 연신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함께 걷는 일행도 이리도 즐거운 산행(트래킹)이 언제 있었나 하듯, 시종일관 웃음이 떠날 줄을 모릅니다.
저 멀리 맞은편 산 중턱에는 사찰과 9층탑이 보이는군요.
도로에 내려섰습니다.
이 길을 건너서 다시 산성둘레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네요.
싸락눈같이 작은 입자의 눈이 찬 바람과 함께 갈길을 막아섭니다
이 멋진 건물은 동문(東門)입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입니다.
선조임금 때 보수하고 인조 2년에 다시 건립을 했으며, 정조 3년에는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했답니다.
이때 성문마다 이름이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했습니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랍니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서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물자수송은 남쪽에 있는 11암문을 이용한 것으로 본다고 하죠.
찬바람도 피하고 눈도 피할겸 해서 누각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몸이 떨려오네요.
벗었던 웃도리도 입고, 모자도 눌러쓰고 다시 또 걸어봅니다.
와! 이 산성(山城) 좀 보세요. 성곽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건가요?
이건 그냥 한마디로 '예술작품'입니다.
송암정 터에 왔습니다.
이 바위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주필암에서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주라고 해서 '대부송'이라 부른답니다.
貫子는 조선시대의 남자 장신구인데요, 관자(貫子)는 상투있는 사람이 머리가 흩어지지 않게 두르는 망건편자의 귀 부근에 달려서, 편자끝에 있는 좌우의 당줄을 서로 맞바꾸어 걸어넘기는 작은 고리로, 권자(圈子)라고도 했는데 관품 또는 계급을 표시하는 사회적 구실도 했답니다.
각 신분에 따라 관자 재료의 사용이 제한되었는데 정1,2,3품의 당상관은 금,옥관자를 하고, 정3품이하 서민들은 뼈, 뿔, 마노(瑪瑙), 대모(玳瑁), 호박 등을 사용했으며 상인들은 소발톱으로 만든 관자를 달았다고 합니다.
바위위의 고사목을 봐요.
뒷편의 소나무는 폭설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몇몇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대요. 그 중 술에 취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불법을 설파했답니다. 이때 감명받은 기생 한명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했는데, 그후로 달 밝은 밤이면 노랫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해요
몇발짝 앞으로 가다가 바라본 송암정 터의 소나무.
송암정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벽돌로 성벽을 높이 쌓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사찰도 눈에 띕니다.
기도효험이 좋아서 많은 불자들이 찾는다 하는 '장경사'입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답니다. 전국 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라 해요. 그리고 그때 8도의 승군 중 충청도 출신 스님들이 머물던 사찰이랍니다.
장경사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답니다.
전승문(북문)이 2km 남짓 남았군요.
--------- 남한산성 내에는 옥정사와 망월사 2개의 절이 있었답니다. 이 절은 전국에서 온 승려들의 힘으로 1624년부터 2년에 걸쳐서 지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때 동원되었던 많은 승려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어서 한흥사, 장경사, 국청사, 천주사, 개원사, 남단사, 동림사 등 의 사찰을 새로 지었대요. 이렇게 해서 17세기 이후 남한산성에는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찰들은 일제강점기때 항일 의병활동을 위해 비밀리에 사용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장경사, 망월사, 국청사, 개원사 4개의 사찰만 복원했다고 해요.
성곽을 따라 둘레길을 걷기 바빠서 장경사도 들려보지 못하고,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서 갑니다.
많은 눈이 내려서 산성 주변의 소나무들은 원 줄기는 물론, 가지도 부러진 곳이 많아 마음 아프게 합니다.
겨울 아닌 겨울 한가운데에 서서 이 사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장경사신지옹성이 보입니다.
여기는 한번 들려보고 가야겠습니다.
옹성은 성문과 성곽보호를 위해 그 앞에 둘러진 성곽으로 남한산성 옹성은 성밖으로 길게 옹성을 빼고서, 적이 접근하는 걸 공격하기 좋게 성벽에 덧대어 지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는데, 그 중 3개가 남한산성 남쪽 성곽에 있습니다.
남쪽 성곽이 다른 곳에 비해 경사가 완만해서 방어가 취약하기 때문에 그 단점을 보완하고, 검단산의 신남성이 적에게 넘어가는 경우 거기서 들어오는 적으 공격을 막기위해 설치했습니다.
다시 성벽따라 걷는 길
남한산성 성곽을 끼고 걷는 남한산성 둘레길 또는 남한산성 옛길은 5개의 코스가 있습니다.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3시간 걸리는 이 길은 '남한산성 역사테마길'로 지난날 아픈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먼저 역사테마길 1코스는 장수의 길입니다.
세계유산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방어 요새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산성로터리에서 남문, 수어장대, 서문, 북문, 산성로터리로 돌아오는데 3.8km 거리에 80여분이 소요됩니다.
역사테마길 2코스는 국왕의 길입니다.
조선시대 국왕의 공간이었던 행궁에서 시작되어, 침괘정을 지나 병자호란 시기 인조가 항복하러 성문을 나간 서문을 아우르는 탐방코스입니다.
2.9km의 거리를 1시간 정도 걷는데, 산성로터리에서 영월정, 숭렬전, 수어장대, 서문, 국청사, 산성로터리로 돌아옵니다.
역사테마길 3코스는 승병의 길입니다.
남한산성을 만들 때부터 전쟁시기 남한산성을 지켰던 승병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서 출발하여 현절사, 벌봉,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로 돌아오는데 5.7km를 2시간 가량 걷죠.
역사테마길 4코스는 옹성의 길입니다.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산성로터리에서 남문, 남장대터, 동문, 지수당, 개원사, 산성로터리까지 3.8km를 80분 가량 걷고
역사테마길 5코스는 산성의 길입니다.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남한산성의 성벽을 두루 볼 수 있는 탐방코스입니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서 동문을 거쳐 동장대터, 북문, 서문, 수어장대, 영춘정, 남문,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로 오는데 7.7km를 200분가량 소요합니다.
군포지(軍舖址)는 조금 걷다보면 있고 또, 조금 걷다보면 보입니다.
군포(軍舖)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입니다. 증정 남한제(1847)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 위에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건축했습니다. 건물의 모양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토석 벽을 두른 형태로 초소 기능에 맞게 정면이 트여 있었답니다.
여장(女墻)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합니다.
남한산성 여장들은 대부분 최근에 수리한 것들이 많은데, 동장대와 주변 외성들은 최근에 보수작업을 하고 있어서 오래된 여장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산성이나 읍성들은 삼국시대 이래로 유지되었거나, 조선초에 축성한 것이 많으며 여장을 두고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군요. 여장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조선후기 성곽 축성의 특징이며,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요철형여장, 반월형여장 등으로 구분하는데, 남한산성의 여장은 모두 평여장이라고 합니다.
남한산성 동쪽편 해발 502m인 망월산 정상부에 자리한 동장대터.
이곳은 남한산성 본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주변에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방어하기 쉽지 않았던 곳이랍니다. 실제로 숙종 때에 외성인 한봉성과 봉암성을 쌓으면서 그 기능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대요.
'동장대터'는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城) 동쪽에 있다고 동장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남한산성에서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며, 동장대는 인조2년(1624) 산성 수축시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초에 붕괴된 것으로 본답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했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한봉성과 연주봉 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군요.
동장대터를 걸어내려오면 마주치는 봉암성 제3암문
일단은 무조건 들어가고 봅니다.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랍니다.
이중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숙종 12년에 부윤 '윤지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했고, 숙종 31년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해 새로 쌓은 성이므로 '新城'이라고도 하고, 동쪽의 성이므로 '東城'이라고도 했답니다.
城의 길이는 2,120m이구요.
'벌봉' 방향으로 갑니다.
성벽이 많이 허물어 졌는데도 그냥 방치를 했군요.
10여년 전에 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성벽은 보수를 하지 않으려나 봐요.
남한산(522m)과 벌봉(512.2m)을 보고 오려고 했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아 여기서 이만 뒤돌아 섭니다.
예까지 왔으면 보고 가야하는데,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드는군요.
'벌봉'은 막상 가 보면 아무런 특징도, 볼거리도, 감흥도 없는 그런 곳이지만,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 해서 벌봉이란 이름을 가졌다죠.
벌봉은 수어장대(497m) 보다 높으므로,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여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고, 화포로 城 안까지 포격을 했답니다.
외성인 봉암성으로 출입하는 아치형의 봉암문.
문루는 없습니다.
또다시 가파른 길을 내려옵니다.
눈 쌓인 성곽길이 너무도 가팔라서 진땀이 다 납니다.
길 아래편에 있는 '옥정사址 암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암문으로 나가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고 뚝 끊겼네요.
길고 긴 산성둘레길도 끝이 다가옵니다.
굳이 이정표를 보지 않아도 북문이 멀지 않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눈과 소나무는 여전히 멋진 풍경을 그리며 서 있고
구불 구불 산굽이를 돌아가는 성곽도 그림같은데
저기 북문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곡선의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모두 다 기분 좋은 일입니다.
수원화성도, 서울 북악산 성곽길도,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 둘레길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가슴속이 환해지는 기쁨을 줍니다.
걷는 내내 따스한 햇살이 부셔지는 들판에 소풍나온 것 같은 벅찬 행복함을 안겨줍니다.
.......... 남한산성 업로드가 많이 늦었습니다. 다녀온 지 2주가 넘었는데도 이제서야 하는 것은, 산행 다음날부터 갑자기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바쁘게 일 처리하다보니 저녁엔 그냥 골아 떨어졌었습니다.
살아갈 수록 점점 바쁘고 하루해가 짧기만 합니다.
이제 조금 숨을 쉴만큼 여유가 생겼기에, 늦긴 했지만 사진을 올려봅니다. 안그러고 어물 어물하다가는 이내 못할 것 같았거든요.
13시 35분.
남한산성 트레킹도 여기서 끝냅니다.
다리가 뻐근해져 오지만, 봄눈을 밟으며 산성둘레길을 걷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9.7km를 걸었습니다. 4시간 가량 소요했구요, 평균속도는 2.4km였습니다.
산행코스는, 맨 위의 지도에 있는 코스의 역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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