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행복한 순간들

조선왕릉 세계유산 - 융릉. 건릉에 가 보다

adam53 2022. 5. 15. 16:04

2022. 5. 10

수원화성 둘레길을 걸은 후, 차량으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융릉과 건릉을 가 봅니다.

융,건릉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지요.

제20대 윤석열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그래서 오늘 융,건륭은 무료로 개방한답니다.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왕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함

이 목록에 등재함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가 있는 문화 및 자연유적임을 인정함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종합안내도를 보고

안내판 옆길로 갑니다.

관람방향을 표시해 놓아서 그 길따라 가면 됩니다.

5월은 푸르러만 가고,

녹음도 짙어갑니다.

융릉을 먼저 간 다음에 건릉으로 갈꺼에요.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능이고,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능.

아담하게 조성된 숲길을 걷고 또, 걸어서

융릉에 도착했지요.

홍살문이 보이네요.

홍살문(紅살門)은 (陵)·(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을 가르키는데,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하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 뒤로 융릉이 보입니다.

장조(1735~1762)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 해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15세가 되었을 때인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었죠.

그러나 노론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부자간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불화 등으로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으며 결국은 1762년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불우한 왕입니다.

헌경왕후는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차녀로, 1744년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혜빈에 봉해졌으며,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혜경궁이 되었죠.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회고록인 『한중록』을 쓰기도 했구요.

문화해설사가 관람객들에게 현릉에 대해 설명하고 있군요.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대문구 배봉산에 무덤을 만들어 수은묘라고 하였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의 무덤을 화산으로 옮겨 이름을 현륭원이라고 불렀다.

1815년 헌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화산 현륭원에 합장하였고,

1899년 원을 능으로 격상하여 오늘의 융릉이 되었다.

아마도 이런 얘기겠죠?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장조에 대한 얘기도....

비각으로 가 봐야죠?

大韓(대한)

莊祖懿皇帝隆陵(장조의황제 융릉)

獻敬懿皇后祔左(헌경의황후부좌)

현릉원 表石

'현릉원 표석은 1789년(정조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릉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이다'

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릉원 (朝鮮國 思悼莊獻世子顯陵園)

융릉표석

'융릉표석은 1899년(광무3)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에 현륭원 표석옆에 새로 세운 표석이다'

능 가까이는 가 볼 수 없어서 카메라로 당겨봅니다.

잔디가 많이 죽었네요.

그래서 울타리 안에서는 잔디심기 작업이 한창이구요.

정자각

香,御路는 정자각 월대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까지 접근하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른다고 해요.

또한,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에 두지않고 측면에 만드는데, 이것은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면서 들어가도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자연섭리를 건축물에 활용한 것으로, 동쪽계단은 신계와 어계로 2개, 서쪽계단은 1개인데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하지만, 내려올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으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의 신로 神路를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고 하는군요.

잔디 작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건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건릉으로 가는 길옆의 소나무에 뭔가가 붙어있길래 봤더니, '소나무 재선충병 예방주사시행목'이라고...

잔디처럼 파랗게 자란 풀밭.

묵은 논(畓)같아 보입니다.

이 풀밭 왼쪽으로 건릉가는 빠른 길이 있지만,

그냥 한바퀴 돌아서 갑니다.

이 푸른 들을 안보고 가면 서운하죠.

피톤치드가 마구 마구 뿜어나오는 솔밭길로 갑니다.

건릉입니다.

능 형태는 융릉과 똑 같군요.

완전 똑 같아요.

香路와 御路

향로와 어로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돌길로, 薄石(얇은돌)이 두줄로 넓게 깔린 길로서

예전에는 참도(參道)라 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왜곡된 왕릉용어를 순화하면서 향,어로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왼쪽은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는 '神이 가는 길'이라 향로라 하고

오른쪽은 제향을 드리러 오는 '왕이나 제관이 가는 길'이라 어로라 한답니다.

향로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이므로 어로보다는 약 10cm정도 더 높고 더 넓죠.

그리고 능 마다 차이가 있긴하지만,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척(약 90cm)되는데요,

향로는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므로, 관람객은 오른쪽의 어로로 걸어야 한다는 거 ...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건물바닥 평면이 丁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인데요,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자각과 수라간, 수복방 이 세건물은 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구요.

정자각 내부.

따가운 햇빛때문인가, 관람객은 별로 없었습니다.

건릉 언저리에도 잔디가 군데 군데 없네요.

여기도 보수작업을 해야겠어요.

 

정조황제 건릉

효의황후 부좌

언제 또 여기를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융건릉 관람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소나무 숲길을 걸어서

다 왔습니다.

 

입구 가까이 있는 이 건물안으로 들어가 봤지요.

뭔지 궁금했거든요.

재실이었어요.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이번에는 융,건릉 역사문화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역사문화관 내부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습니다.

그리고 벽에는 융건릉에 대한 자료가 있어 찍어봤지만, 카메라가 흔들려서 글씨가 흐릿한 것도 있네요.

이젠 집으로 가야합니다.

오늘 융,건릉을 돌아보는데 한 시간 남짓 걸렸네요.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세게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셰계유산 조산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화성 융,건릉 >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10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까지의 정황은 다소 복잡하다.

경종은 후사가 없는 데다 신병이 많아 후계자가 혼미에 빠져 있었다.

이때 노론의 4인방으로 불리는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의 주장에 따라 영조가 세제로 책봉된다. 그러자 소론 측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들고 일어나, 노론의 4대신을 4흉(四兇)으로 몰아 처형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신임사화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겨우 헤어난 영조는 왕위에 올라 자신을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하고 소론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임의리다.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기도 했지만 영조는 노론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을 예의 주시한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 세력이 보기에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론 측에서는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흠을 들추면서 이간질했고, 이들 배경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자를 제거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자, 사도세자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무고하기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가 중첩되자 세자는 급기야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다. 

정조는 즉위 이후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화성 건축을 통해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했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 의황제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로 올렸다.

융릉과 건릉을 잇는 길은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산책로로 많은 사람이 연중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