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0
수원화성 둘레길 걷기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화성 행궁을 둘러보고 갑니다.
서북각루를 지나
언덕길을 내려오면 화성행궁 이정표가 보입니다.
교통량이 많지않은 이 도로를 건너면
수원화성의 서문 '화서문'이 있는데요,
화서문은 1976년 정조20년에 세운 것으로 보물 403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수원화성 북지터라고 보전하고 있는곳을 지났을 때 부터는 행궁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가는데
'나혜석' 생가터가 있네요.
5월의 내리쬐는 땡볕에 땀 흘리며 찾아가는데, 화성행궁 이정표가 보여요.
드디어 행궁에 왔구나!
화령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뿔사!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네요.
오늘이 휴무인가? 둘러보니 보수공사중이라 출입을 금한다네요.
문틈으로 빼꼼 들여다봅니다.
안내문에도 있듯이,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랍니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구비하였구요.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하었다고 합니다.
일부는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고...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하였는데요,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자, 당시 나라일을 보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는데,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고 해요.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1804년에 처음으로 화성에 내려와서 현륭원과 건릉에서 제사를 올리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대요.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답니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는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고 해요.
그리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9년 보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지리를 몰라서 여기까지 어렵게 찾아왔는데, 되돌아서려니 아쉬움이 커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일행들이 있는 연무대주차장을 가려다가, 여기서 행궁이정표를 발견했습니다.
무지한 탓이었죠.
행궁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무작정 찾아왔다가, 화령전만 보고 가려했다니....
엔돌핀이 막 생겨납니다.
그래서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무작정 신풍루 안으로 들어갔더니, 입장권을 끊어오라네요.
이런 실수가...
밖에 나오니 매표소가 있드군요. 입장료는 1,500원.
65세이상은 신분증을 제출하고서, 무료입장권을 받아 입장한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신풍루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관광안내소가 있데요.
안으로, 안으로 go go~
1997년에 복원한 봉수당은 1789년(정조 13) 창건한 건물로, 복원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으며, 처음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는데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요.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는데,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랍니다.
어머니 생일상앞에 서 있는 정조대왕이구요.
생일상을 받은 혜경궁 홍씨입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자나 길 장(長)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봉수당으로 바꾼 것이라고....
지붕위의 저 동물형상은 '잡상'이라고 하죠.
궁궐의 기와지붕이나 추녀마루 위에 올려놓은 장식물로, 화재 예방 또는 안정 등의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789년(정조 13)창건한 복내당은 1997년에 복원했는데, 수원읍 고을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라는 군요.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답니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라고.
그러나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구요,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고...
유여택(維與宅)은 1790년(정조 14)창건, 1998년 복원했으며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대요.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답니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고 해요.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군요.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었지만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로처럼 복잡한 궁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기층헌에 왔네요.
임금의 행차, 행사, 종묘제례악 등에 쓰이는 악기를 보관하고 있드군요.
오래 지체할 수 없어, 이 악기들을 둘러보면서 화성행궁 관람도 끝냅니다.
1790년(정조 14) 창건2002년 복원한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입니다.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답니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풍루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는데,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고 합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고 해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
수원화성 가까운 길가의 음식점 입구에는 이런 인형의 모습이~
화성행궁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자료출처: 수원문화재단 (길고 폭이 좁은 사진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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