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0
수원화성 둘레길 걷기는 [연무대주차장에서 시작, 양궁장을 지나 동북공심돈, 창룡문, 동포루, 동돈, 지동시장(?). 팔달문, 서남암문, 서장대, 서북각루, 화서문, 화성 행궁, 동북포루, 연무대주차장까지 되돌아오는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있는 '연무대주차장'에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양궁장을 지나면서 부터는 성곽길을 걷기에,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진만 보면 누구나 그 둘레길을 걸을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냥 사진만 보고 가겠습니다.
트레킹 코스 : 연무대주차장→ 동북공심돈→ 동포루→ 동남각루→ 지동시장→ 팔달산 → 팔달문 → 서장대→ 화성 행궁→ 연무대주차장 (7.4km, 2시간 40분)
<수원화성 - 조선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10, 은구 2 총 49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시설물 일부가 소멸되었다.(현재 소멸된 시설물 :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화서문(보물),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방화수류정(보물)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퍼온 글)
<팔달산145m>
경기도 수원시 중심에 있는 시의 주산이다.
옛 이름은 광교산 남쪽에 있는 탑 모양의 산이라 하여 탑산으로 불렸고, 지금의 이름은 조선 태조 때부터 불리기 시작하였다.
시내 중심에 있고 산 전역이 아름다워 1974년 팔달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원부읍지》에 '수원부의 주산이며 고적이 많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는 탑산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인 이고(李皐)와 관련된다.
은퇴한 이고가 세상을 떠나 이 산자락에 살았는데, 공양왕이 사람을 보내 근황을 묻자 "집 뒤에 있는 탑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즐겁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가 은거하던 이고에게 벼슬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그림을 보고 "과연 사통팔달한 산이다"고 한 데서 이 산이 팔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도심 속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으로 시야가 탁 트여 시 전체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화성은 서장대·서노대·서포루·화양루 등 시설물을 거느리고 있으며,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이들과 산의 조화가 고풍스러움을 자아낸다.
서노대에서는 한강 이남의 동서남북이 두루 조망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산은 수원시의 혈처에 해당된다고 한다.
산에는 3.2㎞의 순환도로와 3개의 약수터, 각종 운동을 위한 시설과 산책로를 비롯하여 강감찬 장군의 기마동상, 홍난파 노래비, 3·1운동 기념비, 효원의 종 등이 설치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 산림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1960년대 초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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