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0
서울 관악산으로 가는 날은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가 일어납니다.

서둘러 오느라고 했는데도, 서울대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시 10분

학교 앞 도로에는 저마다 바쁜, 차량들이 지나갑니다.

관악산은 처음이 아니기에 여태 다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간다고 해서, 많고 많은 등산로 중에서 택한 오늘의 코스는 서울대 정문에서 시작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입니다.

봄 기운이 느껴지는 아침.
조금 선선한 듯, 조금 포근한 듯한 날씨가 적당히 버무러진 이른 봄날의 아침공기


관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온 때문이겠죠.


이 길은 초행(初行)이라서 이정표를 유심히 살피면서 길 찾아 갑니다.

버스에 함께 타고 온 일행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서너명의 일행들만이 눈에 띄는 군요.
그마저도 함께 가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앞에서서 막 갑니다. 이대로라면 오늘도 혼자서 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다행히도 다믄 다믄 이정표가 있어, 그걸 보고 '연주대' 방향으로 갑니다.

관악산 호수공원을 지납니다.


관악산 호수공원은 옛 수영장 부지인 관악구 신림 9동 203일대 6,460 평방미터를, 1996.12. 28부터 97.12. 15일까지 조성한 공원이랍니다.

자그마한 호수 주변에는 정자와 작은다리를 설치했고 나무를 심었으며 괴석, 쉼터 등을 마련해 놓아 아기자기한 공원으로 꾸몄습니다.

개울옆으로 조성한 등산로는 평탄합니다.


산길로 접어듭니다.



등산로는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할 때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넓고,
납작 납작한 돌맹이를 깔아서 걷는데에 큰 지장이 없도록 했습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내려다 본 개울은, 따뜻한 날씨에 얼음도 다 녹아서 개울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물이 참 맑고 깨끗해 보이는군요.
아침과 한낮은 일교차가 큰 요즘이지만, 그래도 이젠 완연한 봄입니다.

파릇 파릇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10시 45분
제4쉼터에 왔습니다.

1,2,3 쉼터가 어디였는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4쉼터에서는 왼쪽길로 갑니다. 이따가 내려올 때는 오른쪽길로 온다고 해요.

간간히 한,두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원래의 계획은 제4쉼터에서 자운암 능선길, 암릉구간이 있는 그 길로 간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대를 잔뜩하고서 떠난 길인데...

쉼터에서 얼마 가지 않아 '연주대'라고 빨간 글씨를 쓴 바위를 만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운암 능선길을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길 왼편에 좁은 길이 눈에 띄지만, 이정표가 없으니까 그 길이 맞는지 알 수가 없군요.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뒤돌아서서 산 쪽으로 내려가 봅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다닌 小路가 보이거든요.

여기서 만난 개울은 바짝 얼은데다, 흰눈까지 덮혀 있습니다. 여기는 봄이 좀 더 있어야 올 것 같군요.

얼마큼 도로 내려와 능선길을 찾느라 헤맬 때, 한무리의 젊은이들이 올라옵니다.
산 위쪽에 보이는 좁은 길로는 아무도 가지 않는군요. 그래서 그들이 가는 길 방향으로 따라 갑니다.


11시
이정표를 만났지만 자운암 능선길을 안내하는 건 없습니다. 길을 못 찾으니 어떡합니까. 앞 사람들 가는대로 따라갈 수 밖에요.


앞에서 가는 사람들은 개울가에 조성한 등산로를 갑니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은 도림천 계곡길, 그 길로 가게 된 거죠.

한,둘 있던 일행도 가버리고 이젠 혼자가 되었습니다. 산행 시작했을 때의 예감대로 오늘도 혼자가 되었습니다.


데크위에서 내려다 본 개울가에는 샘터가 있습니다. 바가지와 컵을 둔 걸 보면 마셔도 괜찮은 물입니다.

돌담 위에는 造花가 놓여 있습니다.

여기는 뭘하는 곳이기에 노란색의 造花를 꽂아 놓았을까요?

'관악산의 풍수에 대한 안내판'이 있어 한번 읽어보고 가요.
"관악산은 서울 경복궁의 祖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火山됩니다. 따라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합니다. 조선 태조는 火患을 막기위해 무학대사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 원각 두 절을 세웠다 하고,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놓이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은 불기운을 막기위한 풍수적 의미라고 합니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 '호암산'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하는 山上 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등산로에서 만나는 산객들 대부분은 젊은이들입니다.
평일의 등산이라 하면 대개 60~70대 등산객들인데, 오늘은 거의 다 파릇 파릇한 청춘 남녀들입니다.

11시 20분
최근 관악산이 '기운 받는 명산'으로 입소문을 타며 젊은 등산객이 급증하고 있답니다. 너도 나도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선다고 해요. 이처럼 젊은이들이 관악산을 찾는 건, 지난 1월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30년차 역술가 박성준 씨가 '운이 안 풀릴 때 하는 개운법'을 소개하며 관악산을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방송에서 박씨는 "관악산에 가라. 관악산은 서울에서 정기가 가장 좋은 산"이라며 "관악산 연주대에서 같은 소원을 세 번 빌면 들어준다고 할 정도로 에너지가 좋은 곳"이라고 소개하고 난 이후, 온라인에서는 "운이 안 풀리면 관악산에 가보라"는 이야기가 빠르게 퍼졌고, 연주대 인증 글도 이어졌다고 해요. 누리꾼들은 "제2의 두쫀쿠(성수동 유명 베이글집)" 또는, "두쫀쿠 가게의 오픈런 줄이 다 관악산으로 옮겨갔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많은 청년들이 관악산을 찾는답니다.

MZ사이에서 새로운 '핫플'로 입소문을 타며 젊은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는 관악산이지만, 관악산은 길산(吉山)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죠.
전설에는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는 지금의 경복궁 터를 천하의 명당으로 꼽으면서 궁궐의 정문이 관악산을 바라봐선 안된다고 조언했다고 해요. 관악산의 불 기운이 도성으로 쏟아져 전란과 화재가 잦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거죠.

무학대사는 북악산 대신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정궁이 바라보는 방향을 동쪽으로 틀자고 주장했지만, 정도전에 의해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정도전은 유교의 전통을 들어 정궁은 남향이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답니다.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 다툼과 숙청이 이어졌고, 궁궐 화재도 잦았다고 해요.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의 칼날에 비명 횡사했고, 200년 뒤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에 탔는데, 이는 관악산을 조심하라는 무학대사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랍니다.

능선에 올라서자 kbs송신탑과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보입니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대로 '연주대'로 가는 길

산 윗쪽에는 흰눈으로 덮혔습니다. 돌계단 사이 사이 눈 녹은 곳은 얼어서 미끄러워요.


이리저리 꺾인 데크계단을 오릅니다만, 계단 칸칸이도 얼음이 얼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관악산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가까이 보인다는 건, 정상에 가까워졌다는 거죠.

쉼터의 눈도 얼었습니다.

계단도 얼어서 행여 미끄러질까, 난간을 꽉 잡고 올라갑니다.
내려오는 사람도, 올라가는 사람도 설설 맵니다.

연주암으로 내려가라고 가르키는 이정표

연주암으로 내려가기 전에 일단은, 연주대부터 들립니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연주대 방향으로 가자, 눈이 녹아 땅이 질척거리는 넓은 곳이 나타납니다.

질척이는 공터에서 바라 본 연주대

공터를 지나 위로 올라갑니다.


연주대 전망대에 다달았습니다.

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연주대의 모습은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습니다.

저 높다란 바위절벽 위에 암자가 있는 풍경은, 여기가 우리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멋집니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

12시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소문대로 젊은이들 뿐이네요.

다행히도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길지않아, 잠시동안 대기한 후 사진 한 장 찍고

연주대로 향합니다.


연주대로 향하는 길은 좁긴 해도, 안전시설 덕분에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응진전 입구에서는 초파일 燈 접수를 하고, 사람들은 燈을 걸려고 줄을 섰습니다.
기암절벽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이 암자를 연주대라 합니다. 원래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 불렀는데, 고려 멸망 후 조선을 반대하던 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지난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하여 '연주대(戀主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죠.

기암절벽 끝에 위태롭게 선 연주대도 소원 성취와는 거리가 멀다고 해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여생을 죄책감과 피부병에 시달리며 이곳을 자주 찾았는데, 그는 조카를 죽인 업보를 씻고자 숙부 효령대군에게 연주암을 중창하도록 했고, 왕실의 사찰로 삼았다고 합니다.

세조는 연주대에 올라 예불을 올렸지만, 병은 낫지 않았답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난 날 돋아난 종기가 갈수록 퍼져, 극심한 불면증과 가려움의 고통 속에서 생을 마쳤으며,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역시 발에 생긴 피부궤양으로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죽었고, 그때 나이는 21살이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응진전의 문이 열려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암자를 연주대((戀主臺)라고 부르는데, 연주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20호이라고 합니다.
연주대는 조선 초기에 '염주대(念主臺)'라고 했다는데 '군주를 생각한다'는 뜻이라 해요. 이 '염주대'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연주대'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죠.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합니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 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하는데,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른 수행자를 아라한이라 하고, 나한(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없는 경지에 이르면, 공양을 받을 만 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아라한의 경지가 되며,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부르고,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 부르는 겁니다.

다시 정상석이 있는 곳으 로 갑니다.


관악산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벽 위에서 바라 본 기상관측소와 불꽃바위.
몇년전에 왔을 때는, 저 불꽃바위 위에 겁도 없이 올라간 사내도 있습디다. 바위위의 사람보다도, 위태로운 모습을 보는 사람이 더 겁나더군요.


관악산 최고봉은, 관악산 기상레이더관측소(기상관측소) 옆 연주대 불꽃바위(632m).


12시 20분
오늘은 평일이라 그리 많지 않지만, 인증사진 찍으려 줄 서있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금방 땅속에서 쏘옥하고 올라 온, 새싹같이 여리여리한 대학생들입니다.

자꾸만 눈에 밟혀서 떠나기 싫은 풍경.
그렇지만 이제는 내려가야 합니다. 개인산행이 아니라서 느긋하게 산행 할 시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주대를 한번 더 보고, 연주암으로 내려갑니다.



연주대에서 내려오다가 일행을 만나, 셋이서 함께 행동하기로 했지요.

연주암 가기 직전의 '영산전'은 템플스테이 하는 곳입니다.


연주암에 왔습니다.

연주암은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며,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꼽힙니다.
'연주암 중건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태종11년, 동생인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과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며 현재의 위치로 관악사를 옮기고,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은, 높이 3.2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석탑으로 효령대군이 세운 것이라 합니다.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걸 본다면, 연주암은 창건 연도가 오래된 고찰(古刹)이라는 걸 알 수 있구요.

연주암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관악사(冠岳寺)라 했답니다.
1392년(태조1)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康得龍)이 연주대라고 불렀다는 군요.
강득룡.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등이 이곳에서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주대'는 197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396년에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건하여 중건했다고 해요.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안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은 유랑 길에 올랐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원래의 암자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여 추억과 동경의 정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현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하죠.

그 뒤, 두 왕자의 심경을 기리면서 세인들이 이곳을 연주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대요.
연주암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중수,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했답니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886년에도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했다고 해요.
그후에도 계속해서 중수, 신축, 개축을 하였으며, 2005년 연주대를 대수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 연주암 얘기는 여기까지.

연주암에서 우리는 큰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뭐가 문제냐면 '팔봉능선'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도무지 들머리를 찾을 수 가 없다는 겁니다. 연주암을 오가는 등산객들에게 물어봐도, 연주암 접수창구의 직원에게 물어봐도 모두 다 모른다지 뭡니까? 그쪽으로는 잘 안다니는 가 봅니다. 전부다 모른대요.
그래서 연주암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헤매대가, 과천으로 가던 사람이 '효령각'이란 말을 하기에 효령각 옆 계단을 올라갑니다.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한 효령각 옆으로...

12시 50분
효령각 계단을 오르다가 '팔봉능선'을 가르키는 이정표를 만납니다. 이제야 숙제를 푼 듯한 생각이 듭니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한 뒤 왕위를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주자, 효령대군은 관악산에 들어가 불도를 닦았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것은 아니었구요.
효령대군은 조카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지지했답니다. 또한,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나자 양녕대군과 함께 단종 처결에 찬동했다고도 합니다.

계단은 제법 깁니다. 여기도 아직은 계단 칸칸이 눈이 남아 있구요.

긴 계단을 다 올랐습니다. 직진하면 안양으로 간다는 군요.

왼쪽 계단으로 조금 올라가면 KBS 관악산 송신소가 있구요.

시간은 벌써 13시가 되었습니다.
계단끝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학바위'라 쓴 바위가 보입니다. 여기서 부터 팔봉능선 시작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암봉
팔봉능선은 여러모양의 바위가 많아 볼거리가 많고 암릉도 곳곳에 있어, 무척이나 재미있는 능선이라기에 잔뜩 기대를 하면서 갑니다.


바윗덩이가 여기저기 나 뒹구는 골짜기로 내려가자, 저 아래에 보이는 암벽위에 깃발이 펄럭입니다.

길다란 암벽위에 조그맣게 보이는 태극기, 그리고 암벽 첫머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보입니다.
저길 지나간다 생각하니 가슴이 뜁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잔뜩 기대를 하면서 가는데, 왠지 평범한 산길같아 별 감흥이 없습니다.


가끔은 바위 위로 가기도 하지만 멋있다거나, 아슬아슬해서 우회를 한다거나, 심장이 쫄깃해지는 아찔한 재미도 없습니다.

팔봉능선으로 내려왔다는 일행 2명이 있어, 그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위의 사진처럼 지네바위라던가, 아래의 개구멍바위는 볼 수 없었습니다.



효령각 옆 계단을 오르면서 본 이정표에, '팔봉능선'이라 쓰인 것만 보고 제대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팔봉능선 길 안내하는 사람하나 없다보니 길을 잘못 찾았나 봅니다. '학바위 능선'이란 말도 있던데, 아마도 이 길은 학바위 능선이지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평범할 수 가 없습니다.




내려오면서 보았던 깃대봉에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거 바위 위로 가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데요.
한 젊은이가 저만큼에 앉아 있어 그리로 가려는데, 좀 위험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회해서 가자'는 일행 따라서 우회를 합니다. 처음으로 우회를 해 봅니다.


깃대봉 바위 끝부분에 젊은이 2명이 내려오려고 하는데, 이리로 내려오는 건 쉽지않아 보입니다.
두손과 두발로 바위를 잡고서 내려와야 할 것 같군요.

내려오려는 모양인데 밧줄도 없고, 디딤판도 없어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들이 내려오는 걸 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햇빛은 따스하게 내려쪼이고, 봄은 한발 한발 가까이 다가오고

여기는 제천 '작은 동산'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크게 위험한 곳도 없고, 적당히 큰 바위들이 드믄 드믄 있는 그런 산.


13시 35분
'팔봉능선'이라 가르키는 이정표가 하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으로 내려오다가 만난 첫 이정표.
위치표지판에는 매직펜으로 연주암 가는 방향, 삼막사와 무너미고개로 가는 방향, 서울대 방향을 써 놓았습니다.
누군가 他人을 배려해서 써 놓은 거죠.

겨울 추위가 끝나가고 봄바람이 불어온다는 우수,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경칩도 다 지났는데, 응달진 곳에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있습니다. 날씨가 이리 포근한데도 말이죠.




오늘은 함께 걷는 일행이 있어 좋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 것도 좋고, 옆에 있어 든든한 것도 있고.

깃대봉에 있던 젊은이를 제외하면, 이 산 길엔 우리 셋 뿐입니다.
평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없는 호젓한 산 길입니다.



진달래 나무가 꽃 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물이 올라 통통해지고 있어요.








14시 05분
두번째로 만난 이정표는 무너미고개가 100여 미터 남았다네요.

위치표지판마다 화살표와 함께 써 놓은 행선지는, 이 길이 익숙치 않은 등산객들을 위한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씨의 참 고마운 분입니다.




서울대 방면으로 갑니다.
이젠 산을 거의 다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도중에 샘터가 있어, 물 한모금 마십니다.

샘물은 달면서 시원합니다.



하산 시간내 도착하려고 부지런히 걸었더니, 제4쉼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빨리 내려갈 수록 귀가시간이 더 빨라지기에, 쉬어 간다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14시 25분
아침에 연주대로 향할 때는 이 쉼터 왼쪽길로 갔었죠.


산 아랫쪽은 봄이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관악산에는 강감찬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옵니다.
장군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쿨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채 없앴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악산에서 칡덩굴은 별로 눈에 띄질 않는다고 하죠.
또 작은 체구의 강감찬이지만 몸무게는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의 바위에는 아기 발자국같은 타원형의 발자국들이 있다고 해요.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으며,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改名한 이름이랍니다.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에서는, 관악구 봉천동에 사당 안국사를 지어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낙성대공원을 조성했답니다.

고려의 문관이자 장군인.강감찬은 948년 12월 관악구 봉천동 금주(금천)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그의 출생지는 낙성대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엔 신비로운 탄생 설화가 있습니다.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얘기죠.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歸家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落星垈)입니다.
조선전기 학자 성현이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의 민간 풍속. 문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등 문화 전반을 다룬 雜錄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는 문곡성이 아닌 염정성의 화신이라 적혀 있는데, 염정성은 북두칠성의 5번째 별로 형벌(刑)과 공정, 충효를 관장하는 별이랍니다.

983년(성종 3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의 나이는 36세로 늦은 나이에 관직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후1009년(목종 말년)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지만, 강감찬은 문관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고 해요. 84년간의 긴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제3차 거란(요나라) 전쟁때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에 크게 이긴 뒤로 장군처럼 묘사된다고 해요.

고려는 건국 이후 외적의 침략을 받아왔지만, 거란(요)의 침략은 고려왕조에 치명적인 위협이었답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략은 서희(徐熙)의 외교로 거란과 협정을 맺고서 전쟁없이 철수를 했지만, 1010년 거란 2차 침략때는 개경을 점령하므로써 고려 현종(顯宗)이 피난을 했었죠.
그리고 1018년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략을 했을 때, 강감찬은 치밀한 전략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강감찬의 전략은 거란의 병사들이 고려에 깊숙히 들어오도록 유인을 하고, 후퇴하면서 적을 소모시키는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해요. 그 결과 1019년 2월 지금의 平安北道 구성인 '귀주(龜州)'에서 강감찬의 기습전략으로 거란군 10만 명 중 9만 명이 전사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답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꽃 여덟송이)를 머리에 꽂아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대요.
이 전투 이후 거란은 고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는데요,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두 나라는 평화적 국교를 맺었다 합니다.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 인헌중학교, 인헌고등학교와, 어릴 적 이름을 따온 은천초등학교가 있으며, 2008년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 초명, 출생지를 딴 인헌동, 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다고 해요.
낙성대동의 낙성대역 부驛名은 '강감찬'이고, 여기 마을버스 회사명도 은천운수, 인헌운수랍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구요.


호수공원을 지나면서는 車道가 아닌 학교 내 길로 갑니다. 별반 차이는 없지만 아침의 그 길로 가면 좀 더 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오늘은 10km 남짓 걸을 거라고 했는데, 막상 걷다보니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발바닥 아픈 건 물론, 발가락이 너무 너무 아파서 걷는 게 고통스럽니다.

山 모양이 '삿갓(冠)'처럼 생겼다는 '관악산'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로,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라고 불리는 관악산.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 오래된 나무,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불리는 관악산 산행도,

투박스럽고 어설픈 관악산 山行記도 여기서 끝입니다.

15시 10분
아침에 下車했던 서울대 정문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오늘은 13km를.
평균 2.5km의 속도로 5시간 꼬박 걸었습니다.
산행코스 : 서울대정문→제2광장→제4쉼터→신공학관갈림길→자운암능선→연주대(정상)→연주암→팔봉능선갈림길→장군바위→팔봉국기봉→팔봉능선→무너미고개→제4쉼터→서울대정문 (13km,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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