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

'선재길' 눈 위에 쓰는 겨울이야기.

adam53 2023. 2. 8. 15:37

동대산 산행 후, 동피골 버스승강장부터 선재길을 걷습니다.

동대산 산행은 시간상으로도 또, 산행거리로도 너무 짧아서 선재길과 연계해서 산행을 하는건데

그렇게 하면 하루 산행, 하루의 운동량으로 딱 맞습니다.

선재길은, 1960년대 말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에, 도로가 나기 전부터 스님과 신도가 오가던 비밀스러운 숲길이었는데,

불교의 진리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다, 보현보살을 만나 득도한 ‘선재동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선재길'이라 한답니다.

선재(善財)는 불교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인물로 '선재 童子'로 알려져 있는데요,

선재동자는 지혜와 깨달음을 위해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구도 행각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열가지의 큰 원(十大願)을 듣고,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入法界)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해요.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시작해 동피골을 거쳐 상원사까지 약 10km 이어지는 구간인데요,

선재길’은 ‘사색의 길’ 또는 ‘구도의 길’로 불립니다.

개울을 따라 난 숲길을 걸어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선재길은 평지라서 누구나 걷기 좋은 길이지만,

지금처럼 눈이라도 있으면 아이젠을 휴대하고 찾는 것이 좋습니다.

눈이 녹은 곳은 살짝 얼어서 매끌 매끌하더라구요.

눈 내린 숲길에는 정적만이 감돕니다.

진달래, 철쭉꽃피는 봄, 짙푸른 녹음으로 덮힌 여름, 단풍이 물든 가을에는 많이도 찾던 숲길.

오늘은 우리들외에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네요.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사색을 하며 걷고 싶을 때는, 이 선재길이 그만이다 싶습니다.

눈 내린 겨울 숲, 적막한 고요속에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발그스럼해졌어요.

이 깊은 산골 오대산자락에도 봄은 한발 한발 닥아오고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솜털처럼 보드랍네요.

동그란 얼굴에 인자한 콧수염 아저씨가 그려진 [프링글스] 마크.

이 마크엔 눈물 나는 사연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이 치열하게 싸우던 서부전선의 작은 마을.

프록터 앤드 갬블사의 창업자이자 초대회장인 루카시 도비슨(Lucacci Dawbison)은 독일군의 공습에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였습니다.

어느 춥고 배고픈 날,

며칠동안이나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던 고아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군부대 취사실에 가서 먹을 것을 훔쳐오기로 했는데 하필 루카시가 걸렸습니다.

군부대 취사실에 숨어들어 감자와 옥수수 같은 먹을 것들을 몇 개 집어서 취사실을 빠져나오던 루카시는,

이내 어떤 투박한 손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벙어리 프링글스 씨와 루카시의 첫 만남입니다.

호되게 야단을 맞을 줄 알았던 루카시는, 되려 프링글스 씨가 미소를 지으며 감자 몇알과 고기 몇 점도 넣어주자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둘의 인연이 계속 되던 어느 날,

루카시는 프링글스 씨의 손목과 팔, 얼굴 등에 상처가 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식이 조금씩 없어진 것을 눈치 챈 상사가, 말 못하는 벙어리인 프링글스 아저씨에게 거친 폭언을 쏟으며 채찍으로 모질게 때렸던 것을 알고 둘은 껴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던 중 프링글스 씨가 일하는 부대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어 병사들마저 굶는 사태가 일어났고,

루카시는 프링글스 씨가 탈영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뒤이어 어떤 연합군의 벙어리 병사가 독일군의 밭에서 감자를 훔치다가 잡혀, 곧 총살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루카시는 깜짝 놀라 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그 때에 울리는 총성.

총에 맞은 프링글스 씨의 고개가 숙여지면서 그가 쓴 허름한 군모가 벗겨졌고,

그와 함께 굴러 떨어지는 조그만 감자 네 알.

루카시는 그 감자 네 알을 안고 언제까지고 울었습니다.

프링글스씨는 탈영을 한 것이 아니라 배고픔에 떠는 루카시를 지켜볼 수 없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몇 안 되는 감자 몇 알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루카시는, 프링글스씨를 잊지 못해 자신이 만든 과자에 그의 얼굴을 기억해 새겼고

그것이 이 마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커피가 몸에 해롭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하루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만으로도 심혈관 질환, 호흡기 질환, 당뇨병 등 다양한 질환의 사망위험을 25% 낮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국내에서 나왔습니다.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영양조사질병관리청의 한국인 유전체 역학조사자료를 근거로,

19만명 이상의 한국인을 10년 가까이 추적, 관찰한 결과라는데요.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이정은 교수팀이 국민건강영양조사 참여자를 평균 7.7년, 유전체 역학조사 참여자를 평균 9.7년간 추적했는데요,

국민건강영양조사 참여자 37,281명 중 1,473명이, 유전체 역학조사 참여자 154,941명중 4,584명 총 6,057명이 사망했고, 이들의 사망과 커피 섭취량의 관련성을 분석해보니

커피 섭취는  심장병, 호흡기 질환 등 다양한 질환의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요.

커피를 하루 1~3잔 마시는 것만으로도,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심혈관질환 20%, 호흡기질환 32%,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47% 감소했다고 합니다.

커피가 왜 사망률을 낮추는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커피에 들어있는 클로로젠산. 카페인. 트리고넬린. 멜라노이딘 등 생리활성물질이 항산화와 항염증효과를 내고, 혈당수치를 개선하는 게 사망률 감소의 비결일 수 있다'고 추적한답니다.

이 연구결과는 영양학분야 국제학술지(International Journal of Food and Nutrition) 최근호에 실렸다고 해요.

한동안 여길 오지않은 사이에, 이런 조형물을 군데 군데 세웠군요.

숲길과의 조화를 고려해서 그랬겠지만, 이왕이면 조형물 색깔이 좀 더 산뜻했으면 눈에도 잘 띄고 선재길과도 잘 어울리지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음, 뭐랄까...

........................   좀 우중충하다는 느낌?

선재길은 개울을 이리저리 건너가며 걷습니다.

산길을 내기 힘든 곳은 이런 나무다리를 놓아서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개울물은 꽁꽁 얼었습니다.

얼음위를 걸어도 꺼지지 않을 만큼 아주 꽁꽁 얼었습니다.

'안질뱅이'라 부르던, 어릴 때 얼음짱 위를 타고 놀던 그 썰매를 타고 씽씽 내달리면 제격일텐데...

월정사까지 4km 정도 더 가야한다는군요.

낙엽송 군락지를 지납니다.

1914~27년에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낙엽송은 일본이 원산지라서 이름도 '일본잎갈나무'입니다.

침엽수인데도 가을이면 노랗게 단풍이 들면서 낙엽이 지므로, '낙엽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목재의 결이 곧고 빨리 자라기 때문에 조림수로 심었었는데요,  1960~70년대에 많이 심었다고 해요.

어릴 때 듣기로는 전신주와 철도 침목으로 쓸려고 했다던데, 조림용외엔  쓸모가 별로 없나보더라구요. 

오대산 사고에 대한 안내판이 근사한 모습으로 있긴 한데, 유리(?)에 써 있어 읽는 게 좀 안 좋군요.

사진을 곁들여 멋지게 하려고 한 것은 좋지만, 안내판의 소재를 다른 걸로 했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글씨가 어른거려서 읽기가 안좋더라구요.

요즘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하루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물건이 생기고,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옛것이 됩니다.

너무도 빨리, 너무나 많이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세상이 되었죠.

그렇지만 4천년 전에도 사용하던 비슷한 방식의 물건이, 지금도 가정마다 비치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우산입니다.

우산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중국 주나라 시절 도편수였던 노반이었는데,

하루는 정자에서 비를 피하다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습니다.

 

바로 움직이는 정자를 만들면 따로 정자가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 바큇살에 천을 덧대 만든 것이 이 우산입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비가 자주 내리겠죠.  그럴때 필요한 게 우산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우산이 언제 처음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답니다.

다만, 17세기 중엽의 그림인 김명국의 '기려도'에 우산이 그려져 있어서, 그때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을 한다고해요.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조각이나 회화에는,  뙤약볕으로부터 파라오를 보호하기 위한 양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비를 맞지 않으려고한 게 아니라, 왕이나 통치자의 권위 상징으로 쓰인 거랍니다.

비 오는 날 들고 나갔다가 쉽게 잃어버리는 우산, 그리고 양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형태가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그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용하고 있는게 우산이랍니다.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터키입니다.

2021년 12월. '우리문화와 문명, 가치를 잘 표현한 단어'라며 대내외적으로 국명변경 캠페인을 전개했던 터키 정부는,

2022년 6월 영어식 표현인 '터키'를 튀르키예로 바꾸었습니다.

'Turkiye'는 '튀르크인의 땅',  튀르크는 '용감한'이라는 터키어라고 해요.

튀르키예의 수도는 앙카라지만, 최대도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구 1,500만명이 넘는 이스탄불이죠.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 시절 400년간 수도였던 곳으로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있으며,

인천공항 직항으로는 11시간 소요되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튀르키예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6.25전쟁 때 튀르키예가 많은 병력을 파병해서 공산군과 싸웠던 혈맹 때문입니다.

튀르키예인들은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좋아한대요. 꼭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도 그들 사이에서 그런 말을 사용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튀르키예와 우리나라와는 고조선, 고구려와 동맹국이었던 역사가 있고,

또, 전쟁의 아픔을 딛고 고속 발전한 한국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영향도 큰데,

한국과 튀르키예 가 좋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은 2002년 월드컵입니다.

4강 신화를 이룬 두 나라는 3~4위전에서 격돌했는데, 한국 응원단이 태극기와 함께 튀르키예 국기 '월성기'를 함께 흔듬으로써 튀르키예 국민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더욱 깊게 했었죠.

이 튀르키예와 튀르키예와 인접한 시리아 두나라에 지난 6일 4시경에 7.8규모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막대한 재산피해는 물론,  사망자가 하루 5천명을 넘어서고 있답니다.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서북부 지역의 7.8규모의 지진에 이어,  7.5의 잇따른 강진 그리고, 계속되는 여진으로

사망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만 가고, 혹독한 추위로 견디기도 힘들고 또, 지진으로 도로가 망가져 유엔난민기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구호물품을 실은 트럭과 중장비가 피해 지역까지 도착하는데에는 8~10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구조대, 구조장비를 기다리다 못해 주민들은 가족과 이웃을 찾으려고 맨손으로 건물잔해를 파헤치기도 하는데,

뉴스를 보다보면, 건물잔해에 깔린 사람들의 구조요청에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그저 가족의 손만 잡고 있는 모습들이 비춰져서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년이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그리고 지진으로 인해 참혹한 상황의 튀르키예, 시리아에도 봄 소식만큼 따뜻하고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들 모두가 아픔을 잊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회사거리'까지 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오대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가공하던 회사(제재소)가 있어 주민들이 부르던 이름 '會社거리'

회사거리에는 360여 가구가 살던 화전민 마을이 있었는데, 1960년대 말 화전 정리사업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화전민터 흔적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최근까지 사찰 불사에 쓸 재목을 제작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다가,

선재길을 정비하면서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구요,

제재소회사가 있어 '회사거리'라 부르던 여기는, 지금도 '회사거리'라 불립니다.

회사거리를 걸어 월정사로 가는 길도 참 좋지만, 

오늘은 전나무가 줄지어 있는 이 차도를 걸어 월정사로 갑니다.

전나무숲의 상큼한 공기에, 머리가 맑아지고...

월정사 부도군을 지납니다.

스님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부도들은 22기가 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네요.

지장암으로 가는 다리가 보이고.

다리 건너에 있는 남대 '지장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입니다.

一萬의 지장보살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해요.

월정사에 왔어요.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얻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갖고 돌아와 창건한 가람이랍니다.  오대 중에서 중대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했구요.

선재길 끝나는 곳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4년)에 신라의 보천과 효명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원이라고 합니다.

적광전 앞 팔각구층석탑은 상륜부 해체보수중입니다.

1962년에 국보 제48호로 지정된 이 탑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다층석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높이 15.2m로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고 해요.

여러 번의 화재로 피해를 입은 팔각구층석탑은,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해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를 담는 용구인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었대요.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구요.

고려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이 다각다층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앉아있는데요,

현재 이 석조보살좌상은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라 합니다.

(이 사진은 과거에 찍은것임.)

월정사는 고려 시대(충렬왕 33년), 조선 시대(순조 33년), 그리고 1951년 한국전쟁까지 총 세번이나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보살상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다고 해요. 

지금의 사찰은 1964년에 다시 중건된 모습이구요.

월정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넓은 숲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월정사가 보유한 숲은 대략 여의도의 7배 정도 된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임야와 광복 이후 농지개혁 등으로 줄어든 면적까지 감안하면 원래는 이보다 훨씬 넓었을 거라고 해요.

월정사가 이렇게 넓은 숲을 가지게 된 이유는 세조와의 인연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했답니다.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서를 간행한 이유도, 월정사 중건에도 힘을 쓴 것도 그래서였구요.

후일 세조는 월정사를 다시 찾았었는데, 2번의 놀라운 일을 겪게 되었죠.

하나는 상원사 계곡에서 몸을 씻을 때, 때마침 나타난 동자에게 등을 씻어 달라 한 후 피부병이 나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자는 문수보살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고양이가, 법당의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자객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

고양이 덕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월정사 사방 80리의 땅을 묘전(猫田)으로 하사했고,

그래서  월정사는 사찰 중에서 가장 넓은 숲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부터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을꺼에요.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전나무숲 3곳이 있는데, 경기 광릉수목원 전나무숲과 변산반도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숲, 그리고 오대산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숲인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월정사 전나무숲입니다.

전나무 숲길은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에서 시작해 사찰 입구 금강교까지, 약 1km에 달하는 산책로로 아름드리 전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 푸근하고 아늑합니다.

그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전나무 평균 나이는 약 83년 정도이며, 최고령 나무는 370년이 넘는다고 해요.

지금은 숲길은 원래 월정사 전나무 아홉그루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1,000여년 전, 절앞에 심은 아홉그루의 전나무들이 씨를 퍼뜨려 지금은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꽉 들어찬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이 된거죠.

이 전나무는 2006년 10월 23일밤에 쓰러지기 전 까지는, 전나무숲에서는 가장 오래된 수령 600년된 나무였다고 해요.

성황각이 있는 전나무 숲길도 다 끝나갑니다.

동대산 산행과 선재길, 그리고 전나무 숲길을 걸었던 오늘 일정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진고개에서 동대산을 갔다가 동피골로 내려와 선재길의 시작점인 월정사 일주문까지의 거리는 12km 가량이었구요,

시간은 3시간 5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일주문은 절 입구임을 알리는 문으로, 절에 들어서기까지 거치는 세개의 문 중 첫번째 문입니다.

모든 중생이 자유롭게 드나들라는 의미에서 문짝을 달지 않았고,

기둥을 양쪽으로 일직선으로 세워 문을 지탱하는 구조이므로 '일주문'이라 합니다.

'월정대가람' 현판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라는 군요.

성보박물관이 있는 대형주차장까지 가는 길.

개울가에 이리 예쁜 길을 조성해 놓았네요.

선재길 트레킹은 여기서 끝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