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4. 08:00시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으로 갑니다.
비가 내린 다음날이라 아침공기는 상큼하고 상쾌하고 청량합니다.
용문산관광단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
주차장에서 매표소 방향으로 직진합니다.
매표소 앞.
어딜 가든 사찰에 있는 국보와 보물을 관람하고 안하고 간에, 문화재관람료를 내야 입장할 수 있는데요,
산행하기 바빠 '문화재'를 보고 가는 건 안되더라구요. 그냥 사찰 외부 만 수박 겉핡기 식으로 대충 휘둘러보는 정도죠.
오늘 산행은 계곡길로 가섭봉까지 간 후에, 장군봉을 거쳐서 사나사 쪽으로 내려갈 꺼에요.
여태까지 용문산 산행은, 관광단지에서 정상까지 간 다음 다시 관광단지로 내려왔었기에,
하산 지점이 다른, 새로운 길을 걷는 기대감에 들떠서 발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합니다.
길옆의 기념비 들 - 2015년에 조성된 양평의병기념비와 용문항일투쟁기념비.
용문산하면 '용문산 전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7일 ~ 5월 21일까지, 경기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 및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서 중공군과 국군 사이에 벌어진 용문산 전투. 당시 동부전선 용문산에는 국군 6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요.
1951년 5월 17일 1차 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는데,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되는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탐낼 이유가 충분했던거죠.
5월 18일. 중공군 공세가 개시되었을 당시 6사단은 2연대 1, 2, 3대대가 방어진을 구축하고,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의 막강한 물량공세에 후퇴하면서, 전초부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와 합류하였대요.
그 후 2연대는 후퇴를 하지 않고 그대로 진지를 지키며 항전하였답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2연대를 주력부대로 알았던 중공군은, 3개 사단이 2연대 1개연대에게 공격을 감행했지만,
2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서 계속 몰려오는 중국군을 막아내고 있었다해요.
그러다 5월 21일 새벽, 중공군은 퇴각을 했고 6사단은(2,7,19연대)곧 바로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격퇴하였는데, 화천호에 이르러 퇴로가 막힌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쳐서 대부분 화천호에 수장되거나 격멸당했답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UN군과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실행했는데, 당시 사창리전투와 현리전투로 사기가 떨어진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구요.
중국인민지원군의 2차 춘계 대공세로 인해 벌어진 이 전투는, 6사단이 중국인민지원군을 궤멸시키는 대한민국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구요.
관광단지주차장에서 용문사까지는 1km 정도.
숨 한번 크게 쉬고 옆사람과 말 몇마디 나누다 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용문사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문으로 가도 되고, 오른쪽의 도로로 가도 되고
그건, 가는 사람 마음입니다.
용문사는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해요.
그러나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용문사도 창건 당시의 건물이 아닌, 화재를 입었던 절입니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탔을 때는 취운(翠雲)이 큰방을 중건하였고,
1938년 주지 홍태욱(洪泰旭)이 대웅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기념각. 요사채 등을 복구하였구요.
6·25전쟁 때 용문산전투로 불에 탄 것은 1958년에 다시 재건했답니다.
그 후 1983년에 지장전. 범종각. 일주문 일부를 중수, 관음전과 요사를 보수하였고
지장전은 1994년에 완공하였다고 해요.
용문사 앞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이 넘었다고 해요.
둘레가 15m가량, 높이는 42m나 되는,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에서 제일 크고 제일 오래된 나무랍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요,
통일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꽃아 놓은게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답니다.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자 그 자리에 피가 났다는 얘기, 정미의병(1907년)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얘기, 6.25가 발발하기 전에는 구슬피 울음소리를 냈다던가, 쌀 한 말을 바치고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
또,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큰 나뭇가지 하나가 뿌러졌다던가,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하는 얘기가 전해지는 아주 아주 유명한 나무입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그 수령에 비해 식생상태가 우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답니다.
나무의 큰 뿌리 하나가 동쪽 계곡의 맑은 물에서 수분을 섭취하고, 또 다른 뿌리는 남쪽의 解憂所에서 풍부한 영양공급을 받는다고 해요.
용문사 해우소를 청소했을 당시의 얘기에 의하면, 40여 년 만에 해우소를 대대적으로 청소할 때 막상 치우려니 인분은 온데간데 없고
플라스틱 등의 오물만 나오더랍니다. 은행나무에게는 꼭 필요한 자양분이라 나무뿌리가 다 흡수했다는 거죠.
예전에 농사지을 때는 인분과 퇴비를 거름으로 썼는데요, 그때는 농작물도 잘 자랐을 뿐만 아니라 땅도 산성화가 되지않아서 요즘처럼 금비(비료)를 씀으로 인해 산성화된 땅에 유황이나 석회 들을 뿌리지 않아도 되었죠.
1994년에 완공된 지장전.
대웅전 앞 삼층석탑.
대웅전 앞에서 바라 본 은행나무.
------------------ 용문사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을 합니다.
'등산로 안내도'의 바로옆에 있는
이 이정표 뒷편(상원사)으로 가면 능선길로 갑니다.
'용문산 정상'이라 가르키는 방향 즉, 오른쪽으로 가면 계곡길로 가는데,
능선길로 가면 좀 더 수월하고 거리도 가까워서 좋은데, 용문산을 처음 찾는 일행 몇은 '마당바위'를 보고 가야한다고 계곡으로 가자고 해서 그리로 빙 돌아갑니다.
계곡길은 진짜 재미없는데...
크고 작은 돌맹이들로 이루어진 너덜길이라 가는 길도 나쁘고, 많이 돌아가고 힘들게 올라야 할 구간도 있어요.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은 무척이나 맑아 보입니다.
용문사가 있어 산 이름도 용문산인 이 산은,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미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답니다.
용문산의 다른 이름인 '미지(彌智)' 역시 용(龍)이라는 순 우리말 '미르'와 관련이 있다고 하죠.
용문산은 산림청과 블랙야크 선정 100대 명산 중의 하나라서 많은 등산객이 찾음에도 불구하고, 등산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어쩌다 계단이 보이기도 하지만
등산로는 자연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그랬을까요?
아니면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사색의 길이었으면 하는 의도일까요?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등산로는, 짐승들이 다니고 산을 찾는 사람들이 다녀서 자연적으로 생긴 길 그대로입니다.
거친 바윗돌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 게 조금도 변함이 없는.....
마당바위에서 잠시 머무르다 갈께요.
바위 위가 마당처럼 평평하다고 그래서 부르는 이름 '마당바위'.
처음 와 본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바위인가 봅니다.
좋다고 올라와서는
'천국의 계단'에서 사진을 찍 듯, 다리를 아래로 느려뜨리고
겁 먹어 잔뜩 얼은 표정으로 V를...
다시 또, 돌각사리길을 걸어요.
정상까지 1.5km 남았답니다.
이 작은다리를 건너면서 능선까지 가는 동안은 조금 힘든 구간입니다.
게다가 응달이라 눈까지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tv방송을 최초로 한 건 1956년 민영방송국(korcad)라고 합니다. 1961년 공영방송인 kbs에서 방송을 하고, 1981년에 TV 수상기 보급이 80%를 넘어서고 또 컬러TV 방송을 하면서 부터, TV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컬러TV 방송을 하면서 프로그램은 다양해지고 쇼와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늘어나 사람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였었죠.
지금에는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므로써 tv를 볼 시간도 별로 없지만,
그때만 해도 별다른 즐길거리가 없던 국민들은 tv에 흠뻑 빠져들었었는데요,
오래전 한 방송사에서는 전국 각 시,도의 사투리가 재미있다고, 사투리특집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에게 자기 출생지의 사투리를 말해보라 했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 지역의 사투리를 말하던 자리에서
강원도 사투리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묻는 mc 질문에 정선출신의 탤런트 황범식씨는 '강원도는 말끝에 이랬드래요, 저랬드래요 한다'고 말했었죠. 그자리에 있던 출연자들은 그렇냐며 모두다 흉내를 내면서 우습다고 했던 이 방송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방송을 본 사람들 모두는 강원도 사투리가
"......드랬더래요?"로 알게 되어, 그게 강원도 방언으로 굳어졌습니다.
그사람은 임기응변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 말을 쓰며 살았는지 모르지만, 사실 강원도 사람들은 그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사투리를 많이 쓰시곤 했어요. 조부모님도 그랬고 이웃사람들도 또 시장사람들도, 어디를 가나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투리를 심하게 쓰긴 했어도 그렇게 말을 하는건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해마다 '단오'가 되면 '사투리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우리지역의 '강릉사투리보존회' 회원들도 그런 말은 사용하지 않는데,
서산 대사의 ‘답설(踏雪)'에 ‘눈 쌓인 길 갈 때에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자취가 뒤에 올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
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라는 것은 쉽게 내뱉으면 안되는 거 였는데,
온 국민이 보는 tv에서 한, 말 한마디가 이런 결과를 초래할지는 그도 몰랐을테죠.
TV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나는 것 또 한가지.
토크프로그램이나 오디션프로그램 같은 때에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이 가끔씩 비춰지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양손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절을 합니다. 그 영향때문인지 가까운 곳에서도 그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산악회의 시산제 때 봐도 대개가 그렇게 절을 하드군요.
tv에서 봐 왔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따라하는 겁니다.
아마 사극(史劇)드라마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을 꺼라 생각되기도 해요.
신하가 왕 앞에서 하는 절을 봤으니까...
왕에게는 그렇게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두손을 포개서 합니다.
절을 할 때 손을 맞잡는 자세(拱手法)에는, 음양(陰陽)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음양에서 여자는 음, 남자는 양,
남자의 오른손은 양, 왼손은 음이며 여자는 반대이죠.
손위 어른께 절을 올릴 때는 바로 선 다음 남자는 왼손을,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 맞잡고 가슴높이로 올린 후 공손히 두손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동시에 두 무릎을 붙인 채로 엎드리는 것이 평배(平拜) 의 바른 자세입니다.
일어설 때는 완전하게 서며 맞잡은 손은 가슴에서 떼구요.
제사를 지낼 때는 모두 반대로 합니다.
음은 땅으로 내려가고 양은 하늘로 오르려는 음양의 기운까지 옛 사람들이 헤아린 공수법입니다.
양손을 맞잡지 않고 어깨넓이 만큼 벌려서 엎드려 절하는 것은 못배운 절이 되는 것을,
오늘 날 모두 다 그리하는 것은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이겠죠?
가끔씩 TV 에 출연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이건 좀 고쳤으면 하는 게 또 있죠.
바로 부모에 대한 호칭인데요,
우리는 존칭의 의미로 '님'자를 많이 씁니다.
그러다 보니 유명 인사도 TV에서 친부모를 말할 때 아버님, 어머님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는 걸 봅니다.
존경하는 마음에, 높혀서 우리 아버님, 어머님 하는데요,
부모를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면 부모에 대한 친근감이 줄어들게 되어, 친자식은 부모에게 "님" 자를 쓰지 않는 거랍니다.
어머니는 한 분 밖에 안계신 나의 어머니를 말하고,
어머님은 계모나 아내의 어머니인 장모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는 거죠.
아들은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며느리는 아버님, 어머님으로 존대하구요.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친근감보다는 공경심을 앞세워야 하는 까닭에 꼭 "님"자를 붙이는게 맞는 것이고,
남들 앞에서는 시어머님, 시아버님하고 호칭하지만, 직접 면대할 때는 '시(媤}'자는 빼고 "님"자만 붙이죠.
그러니까 "님"자 붙인다고 다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높여서 부른다고 "어머님"하면 '계모'나 '장모'가 되므로 어법에 맞는 바른 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눈이 살짝 언 곳이 계속 이어지네요.
결국은 버티다 못해 아이젠을 신고...
여기는 '안전사고 발생위험구간'이라 금년도에 보수공사를 할 곳이랍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보수할 예정이라니 다행입니다.
능선에 올라섰습니다.
정상도 얼마남지 않았기에 평상위에서 점심을 먹고 가려하는데,
땀을 흠뻑 흘리며 올랐건만 능선에서는 찬바람이 불어 싸늘합니다.
벗었던 조끼와 재킷을 다시 껴입고..
해발 150m의 주차장에서 1,100고지 산을 오르다보면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도 있어 '응급처치' 안내판도 세워놓았나 봅니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이 멈추고 숨을 쉬지 않는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는 응급처치법인데,
심정지 후 골든타임은 단 4분, 초기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 소생률이 증가할 수 있답니다.
심폐소생술을 익혀두면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주 아주 좋은거죠.
심폐소생술은 어떻게 하느냐? 는 위 안내판에도 있듯이 먼저 반응을 확인합니다.
양쪽 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의식을 확인하고,
다음으로는 119에 신고하며 주변에 자동심장충격기(AED)도 요청합니다.
세번째는 호흡 확인을 합니다.
환자 얼굴과 가슴을 10초 내로 관찰해 호흡을 확인하는데, 호흡이 없거나 비정상적이면 즉시 심폐소생술을 준비해야 하고.
다음은 가슴 압박을 40회정도 실시합니다.
환자의 가슴압박점을 찾아 깍지 낀 두 손의 손바닥 뒤꿈치로 압박하는데 분당 100~120회 속도로 5cm깊이로 압박합니다.
가슴압박점의 위치는 복장뼈를 2등분했을 때 아래쪽의 중간 부분이, 심폐소생술 시 가슴압박점입니다.
다섯번째는 인공호흡(2회)을 하는데요,
환자머리를 뒤로 귀울이고 턱을 들어올려 기도를 유지한 다음, 환자의 코를 막고 구조자의 입을 환자 입에 밀착하여 환자의 가슴이 올라 올 정도로 1초 동안 숨을 불어넣는데,
가슴압박 30에 인공호흡 2번 정도로 119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지속합니다.
자동심장충격기가 도착하면은 우선 전원을 켜고 패드를 부착하는데요,
그림의 설명문을 보고 패드 1개는 오른쪽 쇄골아래, 다른 1개는 왼쪽 젖꼭지 아래 겨드랑이이선에 부착을 하고
심장충격기가 심장리듬을 분석하는 동안 환자에게 닿지 않게 떨어져서, 심장충격이 필요하면 깜빡이는 버튼을 눌러 심장충격을 합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이든 심장충격기 사용은 자주 연습해야 위급시 바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막상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나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가슴압박할 때도 정확한 위치에서 해야하는 데, 한번 교육받아서는 잊어버리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누구나 다 알고 다 할 수 있으면 좋은 심폐소생술은, 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태까지는 매번 별 흥미도 못 느끼고 용문산을 오르곤 했었는데
오늘 좀 느긋하게 산행을 하니까, 못보고 스쳐갔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별 대수롭지 않아 보이던 것도,
오늘은 멋지게 보입니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계단도
어디에나 흔한 바위들도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도 그림처럼 멋있게 보입니다.
아마도 여유롭게 산행을 하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가 봅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왼쪽으로 흰눈이 깔린 길은 장군봉으로 가는 길인데요, 오른쪽 계단을 올라 가섭봉까지 갔다가 도로 내려와서 장군봉으로 갈꺼에요.
정상가기 전 마지막 계단.
정상 부근에는 상고대가 하얗게 피었습니다.
가섭봉입니다. 1,157m.
'석가봉', '아난봉'과 같이 '용문산 불교 3봉'인 가섭봉은 부처님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낸 '마하가섭'의 "가섭존자"를 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봉인 가섭봉(1,157m), 석문(1,127m), 장군봉(1,056m), 백운봉(940m), 함왕봉(887m), 도일봉(864m), 중미산(801m)순으로 준령이 펼쳐져 있다.
1931년 정조 때 초의선사가 용문산을 여행하며 남긴 일기에서 '수월암(새수골)에서 하루를 자고,
가섭봉에 올라가서 운필암과 상원암을 거쳐 용문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세기 에 용문산 정상이 가섭봉으로 통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가섭봉의 유래였습니다.
------------- 이제부터는 장군봉, 함왕봉을 거쳐서 사나사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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