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야기

선운사 꽃무릇길을 걷다

adam53 2019. 10. 5. 11:08







































































































































































산행코스: 주차장 - 매표소 - 석상암 - 마이재 - 도솔산(수리봉) - 돌탑봉 - 국사봉(견치산,개이빨산) - 낙조대 - 천마봉 - 도솔암 - 장사송 - 진흥굴 - 선운사 - 주자창 (약13.8km, 5시간)

        


선운산 (336m)

호남의 내금강이자 도립공원인 선운산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본래 도솔산[兜率山]으로 불려졌으나,

백제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구름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선운산은 가을이면 고혹적 풍경을 품는다.

곳곳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 봉우리와 싱그러움을 한껏 머금고 있는 숲,

선운사 계곡에 비친 단풍의 얼굴을 보노라면 세상사 부러울게 따로 없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주위에는 구황봉, 경수산, 개이빨산, 청룡산 등의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계곡미가 수려하고 숲이 울창하다.

 

특히 4월엔 선운사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84호]이 유명하고 9월엔 꽃무릇이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늦가을 선운사 도솔천 일대의 단풍은 실로 장관이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곳곳에 암장이 있어서 암벽등반 클라이머들이 자주 찾고 있으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봄이면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사진 작가들이 찾는 곳

이기도 하다. 


참고사항:

선운사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290호)·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선운사석씨원류(전북 유형문화재 제14호)등 보물 3점, 도지정문화재 8점 및 비지정문화재 30여점이 있다. 입구에는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시비가 있다.


진흥굴: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오르는 길목에 있는 진흥굴은 좌변굴이라고도 하며,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중생구제를 위해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입산·수도한 곳이다.

삼국시대 때 불교가 국교처럼 성행했던 신라에서 제23대 법흥왕의 태자로 탄생한 아사달은 어릴 때부터 불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인도의 왕자로 탄생한 석가모니가 구중궁궐과 애처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몸소 고행을 통하여 득도하고 불도를 중흥시켜 대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그는 그 후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대통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될 신라의 법전에 따라 부득이 24대의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나라 일에는 뜻이 없고 오직 불도에만 힘써 오다가 끝내는 왕위를 물려주고 평소 많은 시주와 관심을 가져온 선운사로 수도의 길을 떠났다. 진흥왕은 왕위를 떠나올 때 왕비와 사랑하는 중애공주를 데리고 선운사를 찾아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진흥왕이 맨 먼저 찾아온 곳은 지금 선운산의 사자암 앞에 있는 석굴로서 좌변굴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후세에 이 굴의 명칭을 진흥굴이라 고친 것은 진흥왕이 친히 거처하며 수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흥왕은 승려가 된 후 이름을 법운자라 칭하고 사랑하는 공주 중애를 위하여 중애암, 왕비의 별호인 도솔의 이름을 따서 도솔암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반송으로 나이는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고하네요. 장사송이라는 말은 이 고을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며, 진흥왕이 수도한 진흥굴 앞에 있다고 해서 진흥송이라고 하기도.


도솔암: 선운사 남서쪽 약 2.5㎞ 지점에 있으며, 깊은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대나무 숲, 절벽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암자 앞에는 높이 20m가 넘는 천인암이라는 절벽이 있으며,

서쪽 암벽 위에는 상도솔암이라고도 하는 내원암이 있다.

그 밑의 절벽에는 미륵장륙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 위에는 거대한 공중누각을 만들어 보호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용문굴:기출굴이라고도 하는데, 검단선사가 절을 짓기 위해서 도솔암 서쪽 용태에 살고 있던

용을 몰아낼 때 용이 가로놓인 바위를 뚫고 나간 구멍이라 하며 그 터가 내원암 남쪽에 남아 있다.


꽃무릇 석산이라고도 하는 수선화과 상사화속의 다년생풀. 9~10월에 붉은색 꽃이 피는데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의 상사화 축제는 이 꽃무릇이 피는 9월에 개최한다.  꽃무릇은 절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하는데, 비늘줄기의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상사화는 이른 봄에 잎이 나서 지고 난 8월경에 연한 분홍색꽃이 피는데, 꽃무릇은 가을에 잎이 올라와서 봄에 지면 9월경에 붉은 꽃이 피며,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상사화라 부르지만,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이 피는 시기와 꽃과 잎의 모양이 엄연히 다르므로 꽃무릇을 상사화라 부르는건 잘못이다.

유독 선운사, 불갑사 처럼 사찰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꽃무릇의 뿌리는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하는데, 비늘줄기의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독성이 강해서 인도에서는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바르는데 사용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찰과 불화를 보존하는데 사용하면서 심었다고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벌레가 멀리한다고


선운사 도솔암: 암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선운사.도솔사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 곳에 신라왕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여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배경하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禪雲寺兜率庵磨崖佛) - 보물 제1200호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禪雲寺兜率庵磨崖佛) -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선운사지장보살좌상 (禪雲寺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80호 청동 불상 표면에 도금한 불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이 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밋밋한 가슴 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지만,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내리고 있지 않으며 용모 등에서 수법이 다르다.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둥근 얼굴은 단아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선은 부드럽다.상체나 하체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은 배부분에서 띠매듭을 지었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