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행복한 순간들

山寺, 한국의 산지 승원 <영주 부석사>를 가다.

adam53 2025. 5. 25. 20:42

2025. 5. 10

영주여행 이틀째

오늘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지 승원 영주 '부석사'를 찾았습니다.

2018년 6월 30일 문화재청이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 전국 각지 외곽의 山地에 있는 사찰과 특유의 문화가 잘 보존된 지역 중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등 7곳을 한꺼번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애쓴 결과, 오늘 찾은 부석사도 사찰세계문화유산 중 하나가 된 겁니다.

많이 걸으면 다리가 아플지도 모를 손주를 배려해서, 승용차로 부석사 입구까지 갑니다.

부석사 정문으로 가면 한참 걸어야 하죠. 그러나 후문으로 가면 주차장 바로 옆이 부석사 경내입니다. 그대신 후문으로 가는 길은 좋지않습니다. 승용차가 겨우 비켜 갈 정도의 좁은 길인데다가, 조금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하죠.

그리 크지않은 후문주차장에는 일찍 온 차량들이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고 약간의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주차장에서 몇분 걸어가면 부석사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올라갑니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화장실이 있어요.

아침안개가 산아래로 내려앉은 부석사는 그림같습니다.

사찰에서의 이런 고즈녁한 분위기는 너무 좋죠.  마음이 평온해지거든요.

경내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마주한 삼층석탑은 東, 西로 2개가 있습니다.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동탑은 높이 3.6m, 서탑은 3.77m라고 하는데, 두개의 탑은 원래의 위치가 아닌 부석사 동쪽에 있던 이름모를 절터에서 발견되어, 196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답니다.

3층 석탑앞에는 한무리의 佛者들이 모여 있어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군요.

추녀가 날아갈 듯한, '봉황산 부석사' 현판이 달린 건물로 올라갑니다. 이 범종각은 누각식의 건물로 1층은 통로로 이용을 하고 2층에는 법고, 목어, 운판이 있는데 정면으로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팔작지붕은 팔(八)자를 닮은 형태의 지붕입니다. 이 지붕은 여덟개의 면을 갖고 있으며, 각 면은 지붕의 정점에서 만나 상승하는 경사를 이룹니다. 전통적인 한국 건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팔작지붕은 사찰과 궁궐, 전통가옥에서 볼 수 있는데, 고유의 아름다움과 상징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건축양식입니다.

경사진 지붕 면은 빗물이 쉽게 흘러내리게 하고 누수를 방지하며, 각 지붕 면이 균일하게 무게를 분산시키기 때문에 전체 구조의 안정성을 높이기도 하죠. 시각적 아름다움도 한 몫하구요.

통로 역할의 범종루 1층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신라 문무왕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사찰입니다. 천왕문과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도착하는데, 무량수전은 기둥 하나 문창살 하나에도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쉬며, 모자람이 없는 균형과 충분하게 절제된 우아한 자태를 뽑냅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사람들은 우리의 문화유산과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배흘림 기둥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배흘림은 흘림기둥의 한 종류로, 보통의 기둥은 상하 직경이 같은데 비해 배흘림은 중간 정도가 가장 직경이 크고, 위와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으로 곡선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둥의 중심부가 상·하부에 비해 더 굵어 중심부에서 위, 아래로 갈수록 점점 굵기가 얇아지는 형태의 기둥으로, 아래에서 1/3 지점이 가장 두꺼운데 이는 착시현상을 이용한 안정감을 주려는 건축양식인 것입니다.

누각건물(범종루) 왼편에는 1979년에 신축한 별도의 범종각이 있는데요, 범종(梵鐘)은 이 종각에 있습니다.

신축 건물에 보관된 범종

이 범종각(범종루)은 보물입니다.

범종각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안양루로 올라가요. 안양루는 1576년(선조 9)에 건립된 건축물입니다. 범종루를 지나면 만나는 누각으로, 안양류 아래를 통과하면 무량수전으로 갑니다. 

안양루는 정면 3칸, 특면 2칸의 팔작지붕의 2층 누각건물이며, 석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안양루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양(安養)은 극락을 뜻하며 이 門 즉, 계단을 올라가면 무량수전이 있죠.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

무량수전 앞 이 석등은 높이 2.97m로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이랍니다. 상하 비례의 조화와 정교한 조각 기법에서 신라 석등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된다는 군요. 화창 주위로는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이 퍼지도록 했고, 나머지 4면에는 보살 입상이 1구씩 새겨져 있는데 보살상의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해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하죠. 

무량수전에서 본 석등과 안양루

무량수전에서 바라 본 전각 들

무량수전 옆에 있는 부석(浮石)으로 가 봅니다. 사실 영주 부석사가 유명한 것은 이 부석 때문이죠.

바위 아래가 붙지않고 떠 있어 '뜬 돌(浮石)'이라 하며,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선묘용녀가 뜬 돌로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찰이름도 '浮石寺'이구요.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의상대사는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고 해요.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의상대사가 탄 배는 이미 가고 없었다죠. 그래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의상대사가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답니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를 하자, 선묘 신룡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고 해요.

그래서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도 '부석사'라 했다 합니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구요.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부석 옆으로 돌아가면 모셔져 있는 불상

다시 무량수전으로 왔습니다.

무량수전 마당 한켠에는,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이런 비(碑)가 3개 있는데, 풍화작용으로 인해 읽기가 좀 어렵습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 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1962년 지정)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하죠.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 합니다.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殿)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님입니다.

법당안에서 사진 찍기가 좀 그래서 가져 온 자료 사진(위)

무량수전의 본존불로 일반적인 불전의 불상과 달리,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것은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기(10세기경)에 제작되었는데 높이 2.78m 된다고 해요. 정교한 조형미와 균형잡힌 비례가 돋보이며, 불상의 위엄이 잘 드러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소조불상으로 평가되며,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부석사 3층 석탑으로 가 봅니다.

보물 제249호 부석사 3층 석탑

이 석탑의 높이는 5.26m, 기단 너비는 3.56m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한다고 하죠.

1960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 중앙에서 얕은 사리공이 발견되었는데, 사리 장치는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조각,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합니다.

탑신부 각부의 비례를 보면 높이에 비해 너비가 조금 넓어 둔중한 감이 있긴 해도, 건실한 체감과 균형잡힌 비례로 장중한 아름다움을 갖춘 석탑이라고 하죠.

삼층석탑에서 바라 본 무량수전(우), 석등 그리고 안양루(좌)

석탑옆으로 조금 가면 '선묘각'이 있습니다.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 설화에 나오는 '선묘'를 모신 건물로 내부에는 1975년에 그려진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습니다.

- 선묘화(畵) 자료사진 참조 -

선묘설화에 대한 얘기.

義相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등주에 있는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신도의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의연하게 대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願을 세웠다고 해요.

훗날 의상이 떠난다는 소식에 미리 준비한 용품을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난 후.

그래서 선묘는 가져온 힘을 바다로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우고 바다에 몸을 던졌대요.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676년(문무왕16년)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으나 이미 다른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죠. 이때 갑자기 선묘龍이 나타나 큰바위를 공중에 들었다 놓자, 이걸 보고 놀란 무리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답니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浮石寺라 지었는데 그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 암벽밑에 있으며, 선묘龍은 무량수전 앞 석등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대요.  이 설화를 뒷받침하는 5m가량의 '石龍 하반부'를, 1967년 5월 '신라오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발굴했다고 합니다. 

선묘각 외부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의상대사와 용으로 변신한 선묘를 그린 그림이.....

삼층석탑 오른쪽으로 조사당 가는 길이 있습니다.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는데, '의상대사 지팡이 나무'가 있다기에 가 봅니다.

산중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잘 다듬어 놓았습니다.

조사당 바로 아래 갈림길

왼쪽으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있다는데, 다 둘러보면 좋겠지만 손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무리겠더군요. 그래서 조사당만 보기로 합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고, 자인당 내부에는 가운데에 석조 석가여래, 좌우에 석조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고 해요.

조사당은 공사중이랍니다. 선비화 생육환경개선 및 보호울타리설치와 조사당 주변 정비를 한다고 해요.

그래도 한번 올라가 봅니다.

국보 제19호 조사당 

조사당 추녀밑에는 선비화를 보호하기 위해 철망으로 막았네요.

조사당은 스님들이 기도 정진 중이라, 법당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랍니다.

전하는 말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답니다.

선비화는 1,300년 이상을 조사당 처마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자라고 있어 신비감을 주고 있는데, 퇴계 이황은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는 군요.

처음으로 보는 콩科의 식물 골담초(선비화) 꽃

조사당 마당 한켠에는, '선비화 후계목'을 몇그루 기르고 있습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해 1377년에 건립했다고 합니다. 의상과 역대 조사를 기리는 곳이죠. 

내부에는 제석천, 범천, 사천왕 등을 묘사한 고려 후기 불교 벽화가 있었댔는데, 지금은 성보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고 해요. 이 벽화는 국내에 현존하는 사찰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있다는 위 자료사진을 보면 범천, 제석천, 사천왕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석사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걸로 본답니다.

다리가 아프다길래 업어준다고 해도, 업혀서 가기 싫다는 손주녀석.

힘들어도 제 힘으로 해내겠다는 의지가 가상하죠?

다시 내려온 삼층석탑에서 무량수전쪽을 봅니다.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불자들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군요.

안양루와 무량수전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9점, 도유형문화유산 2점 등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신라 진흥왕14년(553년)에 창건한 속리산 법주사가 국보가 3점, 보물이 14점이나 있는 것에 비하면, 사찰규모도 작고 법주사보다 후에 창건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부석사에 이만큼이나 많은 유물이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부석사의 유물로 국보는 무량수전 앞 석등(제17호), 무량수전(제18호), 조사당(제19호), 소조여래좌상(제45호), 조사당 벽화(제46호)가 있으며,

보물은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제220호), 부석사 삼층석탑(제249호), 부석사 고려목판(제735호), 고려목판-대방광불 화엄경 진본(제735-1호), 고려목판-대방광불 화엄경 주본(제735-2호), 고려목판-대방광불 화엄경 원본(제735-3호),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제1562호), 부석사 석조 석가여래좌상(제1636호), 부석사 안양루와 범종각(루)가

경북 유형문화재로는 부석사 원융국사비(제127호), 부석사 삼층석탑(제130호) 등 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장한 사찰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이랍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부석사의 석축(石築)은 창건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조성하며 만든 것으로, 돌의 자연적인 생김새를 그대로 활용해 정교하게 쌓은 것이랍니다. 이 석축과 돌계단은, 극락에 이르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가지인 '삼품삼배관(三品三拜觀)'의 구품 만다라(九品曼茶羅)를 형상화한 것으로, 부석사를 찾는 이들은 이 상징적인 석축과 돌계단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된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후문 가까이 있는 부석사박물관에 들려봅니다.

이런,

박물관은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조사당 벽화 보존처리 작업'으로 잠정 휴관 한다네요.

주차장까지 왔습니다.

내일이면 직장에 출근해야 할 자녀들이기에, 더 이상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귀가하기로 합니다.

따라서 이틀 동안의 영주 여행도 여기서 끝냅니다.

부석사 관람기도 여기까지이구요.

오랜만에 자식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기에, 더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