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행복한 순간들

영주 '소수서원' 돌아보기

adam53 2025. 5. 25. 20:24

2025. 5. 9

이 좋은 계절 5월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가족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들과 딸, 막내 손주와 옆지기 그렇게 다섯이 간 곳은 영주.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훌쩍 떠난다는 생각에 우리들은 마냥 들떠 있었죠.

도착하면서 제일 먼지 찾아 간 곳은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야생생물보전원'입니다.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481번길 33 '국립공원야생생물 보전원 중부보전센터'를 방문한 시간은 11시 20분

'여우생태관찰원'은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야생생물보전원에서 2016년에 개관하여 운영하는 시설입니다.

멸종위기 야생동물 I급인 토종 붉은 여우(Vulpes vulpes peculiosa)를 복원하고, 사고를 당했거나 질병에 걸린 여우를 보호하며 회복시킨 뒤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설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월요일을 제외하고, 사전예약을 해야만 10시에서 16시까지 전문해설사의 안내로 여우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장예약도 가능합니다.

여우는 위 안내문의 정해진 탐방시간에만 볼 수 있는데요, 전문해설사사와 함께 다니면서 여우를 보는 거죠.

건물 밖에는 엄마여우와 아기여우 모형이 있습니다.

아무때나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사전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 왔다가, 탐방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아쉬움을 안고 이 여우모형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갑니다.

국립공원야생생물보전원에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증식과 복원을 하므로써, 우리나라 자연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도록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지리산 반달가슴곰, 설악산과 월악산의 산양, 덕유산의 멸종위기식물, 소백산 여우 등 멸종위기종을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부보전센터는 여우를, 북부보전센터는 산양, 남부보전센터는 반달가슴곰, 식물보전센터는 식물을 보전하고 보호합니다.

건물 뒷편으로 돌아가면 여우가족 세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에 가까운 모형입니다.

여우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동물입니다. 평균수명은 3~6년 정도되며 민가 주변야산, 키 작은 나무가 있는 덤불숲 가장자리등 사람가까이에서 사는 잡식성동물입니다. 그러던게 쥐잡기 운동에 따른 2차 약물 중독, 불법 포획, 서식지 감소로 우리나라에서는 멸종되었습니다.

여우는 쥐, 두더지같은 설치류, 멧토끼, 꿩 등의 소형동물, 곤충과 열매를 먹는 잡식성으로, 생태계에서 개체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면서 야생생물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그래서 한국에 살던 종과 같은 여우를, 한반도 인접지역에서 도입하여 북쪽으로는 설악산, 남쪽으로는 지리산까지 자연스런 확산을 통하여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여우가 살 수 있도록,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소백산에서 복원하는 겁니다

여우를 본다는 기대를 안고 '여우생태관찰원'을 찾았다가, 정해진 탐방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우리도 아쉬움안고 돌아갑니다.

점심식사 후 소수서원을 찾았습니다.

소수서원에 도착했을 때도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요, 관광안내봉사실에서는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관람객들을 위해 주황색의 '양심 우산'을 비치하고 무료로 빌려줍니다.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번지의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입니다.

소수서원 인근에는 '선비세상'이 있어, 시간여유가 있거나 관심이 있다면 그곳에 들려 볼 수도 있습니다.

'선비세상'은 한국의 전통 문화인 한옥, 한복, 한식, 한지, 한글, 한음악의 여섯개 테마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속에 우리의 선비정신과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각 테마관마다 첨단매체를 활용하여 전시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 곳이죠.

소수서원 관람료는 50% 할인되는 지역이 있고

관람료는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도 둘러볼 수 있는 통합요금을 징수합니다.

어른 2천원, 청소년 1,330원, 어린이 660원 그리고 국가유공자, 6세 이하, 장애인, 65세 이상은 무료입니다.

입구에서 조금 걸어오면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조형물인데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撞)이라는 깃발을 달던 깃대(당간)를 고정하기 위한 돌기둥입니다.

지금의 소수서원은 숙수사(宿水寺) 절터였습니다. 그래서 당간지주가 있는 겁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이며,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숙수사'는 회헌 '안향'이 소년시절 글 읽던 곳이었답니다.

고려후기 (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의 학자 회헌 '안향'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40여년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안향다운 건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다고 하죠.

당시는 불교와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답니다.

숙수사 당간지주를 지나면서 보이는 개울 건너편에는, 고풍스런 정자 하나가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저기도 한번 들려볼까 봐요.

소수서원은 '사적(史蹟) 55호'랍니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보이는 '경렴정'은 주세붕이 지은 정자로, 국내의 서원정자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죠.

경량정옆의 이 은행나무는 수령은 500년이 넘었다는 군요. 그래서 1982. 10. 26일 자로 보호수로 지정했답니다.

지도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백운동이라 현판이 걸린 앞에 옛날 선비복장을 한 분이 서 계시는데요, 강학당은 학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던 곳입니다.

 

------------ 신재(愼齋) 주세붕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안향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 5월, 풍기군수에 부임한 후 3일 만에 안향의 고향 순흥을 찾았고, 그 길로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지만,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았는데,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거기는 늘 흰 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주세붕은 이름을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답니다. '사액서원'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하죠.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 해요.

강학당 앞, 선비복장을 한 이는 우리에게 환복(換服)을 하고 강학당에서 1시간 동안의 체험(공부)을 하라 권합니다. 돌아 볼 곳이 많은 우리로서는 1시간이 글쎄요, 너무 많은 시간인데요...

------------------    소수서원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봅니다.

백운동을 거닐면서 '안향'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주세붕'은,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다고 해요. 그리고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 남짓 땅 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 합니다. 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고 하죠.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대요.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하고, 그해 8월11일 '안향'의 위패와 함께 영정(影幀)을 봉안했답니다.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입니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한 책 '어제내사본(御製內賜本)과,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천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라 해요. 장서각은 중종 38년 무렵에 주세붕이 세웠구요.

장서각 앞에 있는 정료대(庭燎臺)는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위에 관솔을 피워 밤에 정원을 밝혔다고 해요.

직방재, 일신재에 왔습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같은 건물을 2개의 칸으로 나누었습니다. 원생 교수와 서원의 임원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직방재는 앞에서 봤을 때에 왼쪽에, 일신재는 오른쪽에 있는 방입니다.

'직방재'의 '직방'은 '주역'에서 깨어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고,

'일신재'의 '일신'은 '대학'의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 라는 문장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어쩌다가 해설사하시는 분이 사진에 찍혔네요. 사실은 국보 제111호인 회헌 영정 碑를 찍으려던 것이었는데 같이 찍힌 것이거든요.

소수서원내의 건물들은 다닥 다닥 붙어있다고 할 정도로 가까이 있습니다.  돌아서면 이 건물, 돌아서면 저 건물입니다.

터가 그리 넓지 않아서 오밀조밀하게 지은 때문이겠죠.

'전사청'은 향사 시 사용하는 祭器를 보관하고 祭物을 마련하던 곳입니다.

제물을 장만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편리하도록 문성공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중종 37년(1542)에 주세붕이 문성공묘를 지으면서 함께 지었다고 하죠.

'영정각'에 왔습니다.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 안향의 영정을 모셨답니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이 드문 일이기에 특별히 영정각을 지었다는 군요.

영정각 안으로 들어갑니다.

영정각 내부의 사진들을 찍어봤는데, 하나같이 흐릿한 게 제대로 알아볼 수 없네요.

'일영대'는 해시계랍니다.  맑은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걸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해요.

자연석 주춧돌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寺)의 유적이라는 말도 있다합니다.

보물 제485호 '대성지성문선왕 전좌도'의 제작년도는 1513년(명나라 정덕 8년)이랍니다.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있을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데, 공자는 다른 인물보다 크게 그렸고 제자들은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고 해요.

소수서원에는 보물이 여러점 있습니다.

59호인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안향의 위폐를 모신 문성공묘는 보물 제1402호,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는 보물 제717호, 강학당이 보물 제1403호, 조금 전의 대성지성문선왕 전좌도 485호가 있으며, 안향의 초상화는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려 충렬왕때의 회헌 안향(1243~1306)은 원나라에 여러차례 다녀오며 주자학(성리학)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여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알려졌죠.

학구재

학구재와 지락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입니다.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로 2동의 건물이 '기역자'모양으로 조금 떨어져있는데,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며, 어린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라 동몽재(童蒙齋).

'지락'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에 따온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랍니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고 해서 앙고재(仰高齎)라고도 한다네요.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사료관까지 왔습니다.

史料館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료관 내부에는 소수서원의 연혁을 비롯하여 소수서원의 역사, 제향, 유물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수서원 관리사무소'까지 왔다면 서원을 두루 다 돌아본 겁니다.

화장실이 있는 바깥으로 나와서 '소수박물관'쪽으로 갑니다.

소수박물관은 이 나무다리 '백운교'를 건너갑니다.

죽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흐르는 죽계천.

소백산 국망봉가는 길에는 죽계계곡이 유명합니다. 죽계(竹溪)가 처음 알려진 것은 고려 때 '안향'의 후손 '안축'의 '竹溪別曲'이었는데, 후일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물소리가 노래소리 같다고 해서 '竹溪九曲'이라 이름지었다는 데,

순흥은 현재 영주시의 일부인 '영주시 순흥면'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1413년)에 '흥주도호부'를 둘 정도로 중요했던 고을이었습니다.

그러던게 세조 3년(1457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사 '이보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면서, 순흥마을 유생은 물론 백성들까지 화를 당하는 '정축지변'이 일어났고, 순흥마을의 남자들은 젖먹이까지 죽임을 당해, 30리 일대는 피로 물들었답니다.

이때의 시신을 소수서원앞으로 흐르는 이 죽계천에 수장을 했다고 하며, 핏물이 10리를 흘러가 멎었다는 곳에는 피끝동네가 있다고 해요.

다리를 건너 박물관가는 입구, 죽계계곡을 바라보는 곳에는 정자 '광풍정(光風亭)'이 있습니다.

2002년에 세운 광풍정은, 앞에는 竹溪가 흐르고 뒤로는 연화산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퇴계 이황이 이름지었다는 광풍대는 정자 인근에 있다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어 어딘지 모르겠더군요. 

광풍정에서 좀 더 안으로 걸어가자 소수박물관 기획전시실이 보입니다.

전시실 옆 잔디밭에는 고인돌과 선돌이 있고 '바느레고분'이 있구요.

기획전시실은 '간찰에 얹어 보내는 사계절 안부'展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5월 3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편지를 쓰는 방법부터 편지에 담긴 사연 등등, 편지에 관한 여러자료를 장기간 전시합니다.

'필사의 방'이라고 해서 마련한 이 공간은, 실제로 편지를 써보는 곳입니다.

오른쪽 2개의 책상에서 써 보던가, 아니면 왼쪽의 둥그런 상위에서 필사를 해 보는 거죠.

기획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기획전시실 맞은편에 소수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서는 소장 자료들이 훼손된다고 사진촬영을 禁합니다.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는다면 어느 박물관이나 사진을 찍게 하던데, 소수박물관은 안됩니다.

그래서 박물관에 대한 사진은 없습니다

박물관은 여러모로 자세하고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 서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해도, 박물관을 나오는 순간 다 잊어버렸습니다. '石頭'라서 그런가 봐요.

백운교를 건너며 뒤돌아 본 광풍정.

지근거리에 있는 선비촌 관람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영주시의 대표 고택을 한곳에 모아, 선현의 학문 탐구의 장소 그리고 전통생활 공간을 재현해 놓은 곳.우리 고유의 사상과 생활상의 체험교육장으로 설립한 선비촌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손주가 다리가 너무 아프다길래 안들리고 그냥 갑니다.

강학당은 중종 38년 주세붕이 세운 건물입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 강학당(講學堂)이라 했습니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죠.

관람객 여러명이 선비 옷차림으로 환복을 하고 앉아서 강학체험을 하고 있네요.

성생단(省牲壇)

성생단은 제사에 쓸 제물을 검시하는 단으로 생단이라고도 합니다.

소수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음력으로 치면 날짜 가운데 처음 "丁"자가 들어 있는날)에 제향을 지내는데, 제향 전날 선택한 제물을 올려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보던 곳이 성생단이랍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숲은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지고 키가 커서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불리우는데, 죽계와 닿은 평지에 있는 소수서원이 풍수적으로 뒤쪽이 허(虛)해서 소나무숲을 만들어 보완했다고 해요.

그리고 운치있게 뻗은 이 소나무 가지들은 서원에 가까울수록 서원쪽으로 숙이고 있어, 서원에 공경을 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군요.

비가 오는 날인데도 관람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천천히 여유있게 둘러볼 수 없어서,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빠진 곳도 몇 있네요.

그 중에 '敬'자 바위가 있습니다.

소수서원 출입문 입구의 경렴정(景濂亭)에서 건너다보이는 경(敬)자 바위 일대는, 소수서원의 여러 경관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이라합니다. 박물관에서 나와서 돌아올 때 죽계천을 따라 내려갔어야 했는데, 백운교를 건너왔기에 보지못한 곳입니다. (아래 자료사진 참조)

여기는 죽계구곡의 제1곡(백운동 취한대)으로, 이곳이 일대의 최고 경승지라는데

敬자는 학문과 도(道)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덕을 쌓는 중요한 기틀이기에, '敬'자를 바위에 새긴다는 건 이곳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는 중에도 학문을 위한 근본적인 마음가짐만은 내려놓지 않기를 바라는 주세붕의 염원이 진하게 담겨있다고 본답니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敬'자를 새기고, "회헌(안향)을 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면 건물이 없어지더라도 '경'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게 되리라"했다고 해요. 옛말에 '경'은 구차함의 반대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다면 이것은 곧 불경이라며, 사당은 오래 보존되지 못해도 이 글씨가 마멸되지 않는다면 천년 후에 이 바위를 일컬어 경석(敬石)이라 하는 것에 족하다고 바위에 글자를 새긴 뜻을 밝혔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경자바위 위치는 소수서원의 좌청룡 자리로 볼 수 있다 합니다. 옆에서 보면 '서원을 노려보는 호랑이 머리'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이를 비보(裨補, 돕는)하기 위해 '호랑이 입에 채운 무거운 자물쇠'가 바로 주세붕의 '敬'자라고 풍수지리학자들은 풀이 한다네요.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10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내일은 부석사를 가 봅니다.